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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소나 Aug 27. 2024

#29. 국제 거지

"현실을 빠르게 인정하자."

나는 튀르키예를 여행하기로 마음을 먹고 세부 일정과 여행할 장소 그리고 비용을 계산했다. 튀르키예는 여느 국가(이스라엘, 요르단, 이란, 이라크 등)와 달리 쾌적한 자연환경과 다양한 먹거리 그리고 유럽과 같은 분위기로 배낭여행자들이 사막과 돌 그리고 뜨거운 바람이 지겨워질 때쯤이면, 다음 여행지로 선택하는 나라이기도했다. 무엇보다 튀르키예는 나에게 "나는 이방인이구나."(#24. 세계지도, 참고)라는 깊은 깨달음을 주었던 나라인 만큼 나는 그곳에서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바람은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과 함께 단 며칠 만에 물거품으로 끝이 났다.


서아시아와 남유럽 사이에 있는 튀르키예는 중동 국가지만 아시아와 유럽의 문화가 동시에 존재하는 흥미로운 나라다. 특히 이스탄불은 아랍과 유럽의 분위기가 절묘하게 섞이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보스포루스 해협(the Bosphorus Strait) 주변으로는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의 대표적인 건물인 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ce Palace)이 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로 유명한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Sultan Ahmet Mosque(Blue Mosque)와 예수 모자이크로 유명한 아야 소피아(Hagia Sophia Mosque)가 관광객의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


나와 룸메이트 형은 이스탄불을 삼 일정도 여행하고 에게해(Aegean Sea)를 끼고 있는 에페소를 시작으로 파묵칼레-안탈리아-콘야-카파도키아-앙카라 순으로 둘러볼 계획이었다. 이스탄불에서의 모든 시간과 순간이 우리에게는 천국이었다. 다양한 볼거리(수피 댄스, 바자르, 고대 유적)와 침샘을 자극하는 음식들(도네르 케밥과 미디예 돌마[홍합밥]), 무엇보다 관광객만을 위한 경찰과 친절한 사람들의 미소는 이스라엘에서 느끼지 못한 형제애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돌마바흐체 궁전을 마지막으로 나는 이스탄불 여행 일정을 마무리하고 다음 날 파묵칼레로 떠나기로 했다. 궁전을 나와서 아름답게 가꾸어진 공원을 걷고 있는데, 키가 큰 두 명의 남성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자신들은 경찰이고, 요즘 관광객들 사이에서 위조지폐 신고가 많다면서 우리의 돈을 검사하고 싶다고 했다. 그들은 경찰 신분증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건넨 달러를 하나씩 검사하기 시작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큰 문제가 없다는 듯 다시 돈을 돌려주었다. 나는 유명한 관광지에서는 이런 검사도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우리는 숙소로 오는 길에 배편을 예약하기 위해서 환전소에 들렀다. 나는 복대(안전하게 귀중품을 보관하기 위해서 허리에 차는 작은 여행용 가방)에서 50달러를 꺼내서 환전하려고 했다. 그런데, 100달러와 50달러가 보이지 않았다. 흰 봉투 안에는 분명 100달러 6장과 50달러 6장이 있어야 했지만, 내 눈앞에 있는 것은 1,200달러 중 1달러, 5달러, 10달러 지폐뿐이었다. 순간 숨이 턱 막히면서 앞이 깜깜해졌다. 나의 모습을 본 형이 물었다.


"00,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나는 형의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그러자 형이 나를 흔들면서 다시 물었다.


"뭔 일이야? 왜 그래?"


다시 정신을 차린 나는 형에게 말했다.


"형, 돈이 없어졌어! 100달러와 50달러가 하나도 없다고!"


형은 나에게 조금 짜증이 나는 말투로 말했다.


"장난하지 말자. 지금 그런 농담할 상황 아닌 거 너도 알지?"


그리고 형도 환전하기 위해서 지갑을 열었는데...
 

나는 형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형에게도 분명 나와 같은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형이 말했다.


"나도 없다."


환전소 앞에서 우리는 서로 말을 잊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잠을 잘 때나 이동할 때 단 한 번도 지갑과 복대를 품 안에서 멀리 한 적이 없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형이 말했다.


"어제 같이 묵었던 시리아 아저씨 말이야. 나한테 자신은 지금까지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신이 자신에게 항상 돈을 줬다고 했어. 아마 그 사람이 우리가 자는 동안 돈을 훔친 것 같다."


솔직히 형의 주장은 일리가 없었다. 그 사람이 정말 우리가 잠을 자는 동안 돈을 훔쳤다면, 어떻게 100달러와 50달러만 가져가고 다른 지폐는 그대로 남겨두었겠는가! 그것도 우리가 잠이 깨지도 않은 상태로 말이다. 우리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만한 다른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숙소에서 짐을 지켰고, 형은 이스탄불 관광 경찰서로 가서 어제 같이 묵었던 시리아 관광객의 인상착의와 복장을 상세히 설명하고 그 사람을 경찰관들과 함께 찾아 나섰다. 여섯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고, 형은 그 사람을 찾기 위해서 정신없이 이스탄불 시내를 돌아다녔다. 그때는 핸드폰이 없었기 때문에 서로의 상황을 수시로 확인할 수도 없었다. 형은 저녁 여섯 시가 되어서야 숙소로 들어왔다.


"못 찾을 것 같아."


그 말과 함께 나와 형은 서로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우리는 이스탄불에서의 마지막 밤을 기억에 남을 만큼 멋있는 추억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유명한 수피 댄스도 구경하고, 유명한 호텔에서 저녁도 먹으면서 바자르에서 지인들에게 선물할 기념품을 사려고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기대와 계획은 이제 헛된 바람이 되었다. 튀르키예 여행을 3주 정도 계획했기에 계획보다 빨리 이스라엘로 돌아가려면 비행기표 일정을 변경해야 했지만, 그 돈조차 없었다. 형은 1,300달러 중에서 100달러가, 나는 900달러에서 80달러만 남았다. 남은 지폐는 모두 1, 5, 10달러의 작은 지폐뿐이었다. 배가 고팠다. 점심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우리는 일단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방파제에서 저렴하게 팔고 있는 고등어 케밥을 하나 사서 형과 나눠 먹었다. 빵과 음료수는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서 사지 않기로 했다. 최대한 며칠을 숙소에 묵어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스탄불을 힘없이 돌아다니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논의했다.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가기에는 형과 나의 돈을 다 합쳐도 100달러가 부족했다. 한국에 연락해서 도움을 요청할까도 잠시 생각해 봤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지금의 상황을 스스로 해결하고 싶었다. 복잡한 생각과 허기진 배 그리고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혹시 한국분들이세요?"


우리는 거의 동시에 한국어가 들리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긴 머리의 여성분이 무술 복장을 하고 Y 배너 옆에서 몇몇 사람들과 함께 서 있었다. 그분은 자신은 한국 사람이었고, 덴마크로 입양되었다고 했다. 그분은 그곳에서 파룬궁(불가[佛家]와 도가[道家]의 원리에 기초한 중국의 심신 수련법)을 배웠고,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어디에 묵고 있으며, 앞으로의 여행 계획을 상세히 물어보았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졸지에 국제 거지가 된 나의 처지가 너무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지금 당장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억울했다. 눈물을 보이는 나에게 그분이 물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제가 무슨 실수를 했을까요?"


우리는 오늘 일어난 사건을 그분에게 자세히 이야기했다. 선한 눈빛과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분은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깊이 공감해 주었다. 때로는 같이 우는 척도 해주셨다. 정말 고마웠다. 왠지 의지가 되고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를 떠나려고 할 때, 갑자기 그분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작은 돈이지만 오늘 저녁은 맛있는 것 드시고, 힘내세요."


그분이 건넨 돈은 100달러로 우리가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있는 비행기표를 다시 예약할 수 있는 돈이었다. 우리는 그분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돈을 계산해 보니 저녁에 빵과 우유를 먹을 수 있을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서 도넛 모양의 시미트(simit) 빵과 우유 한 병을 사서 그 자리에서 게 눈 감추듯 먹었다. 그것으로 부족했던 우리는 케밥을 하나 사서 정확히 절반으로 나누고 그것을 한입에 해치어 버렸다. 그런데 케밥을 먹는 데 가게 뒤편에 이런 글귀가 보였다. "00 호텔 수피 댄스 무료 공연" 우리는 흥분하는 마음으로 호텔로 달려가, 옥상 정원의 제일 구석에서 현란한 동작의 수피를 댄스를 아무런 생각 없이 감상했다.


나는 솔직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몇 번이고 튀르키예에서 일어난 도난 사건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었을 거야!"

"다른 지역으로 가면 더 위험한 상황에 놓였을 수도 있어."

"몸을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어디야."


이런 생각은 모두 그때의 상황을 어떻게든지 좋게 기억하려고 하는 '의도적-심리 저항'의 모습이라는 것을 늦게서야 깨닫게 되었다. 나의 무의식이 부정적인 상황을 의도적으로 저항하면서 만들어낸 '피해의식'이라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나는 튀르키예 사건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해석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 또한 발견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조건과 예기치 못한 상황이 닥칠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그 상황을 수용하는가에 따라서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수많은 재밋거리를 즐기는 것과 유명한 장소를 여행하고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을 만들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안타까워만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나는 튀르키예를 저주의 도시, 절대 가지 말아야 할 나라,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동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배낭여행이 주는 기쁨과 새로운 경험의 설렘 전체를 부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과연 여행에만 해당할까.


금수저는 아니어도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과 비교했을 때, 나의 가난한 가정환경과 엄격한 아버지의 교육, 어릴 적부터 원하지 않았던 힘든 일들, 부족한 학업 환경과 나의 학업 실력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이었다. 누구는 내가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은 다 그런 이유가 있다고 나를 위로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상황이 바뀌었을까? 내가 갑자기 주변 사람의 격려와 위로에 힘을 얻어서 한순간 새로운 사람으로 변해서 성공의 가도를 달릴 수 있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모두 다 알 것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나는 바꿀 수 없는 과거의 ''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도전 앞에 ''라고 묻는 것이다. 의문사 왜(why)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이것이 부사로 쓰일 때는 어떤 상황이나 이유를 묻는 의미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서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반면에 감탄사로는 어떤 사실에 대한 확신을 요구할 때 쓰인다. ("왜, 그 사람은 운동만 하면 확신에 차서 말을 하잖아.")


내 인생을 이미 일어난 일의 이유를 묻는 부사가 아니라, 확신할 수 있는 감탄사로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과거의 실패와 불편한 환경에 핑계를 대지 말고, 앞으로 바꿀 수 있고, 도전할 수 있는 상황을 미리 상상하면서 감탄해 보는 것이다. 인생이 계속해서 실패로만 기억되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 아깝지 않겠는가.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지금의 상황을 빨리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정은 포기가 아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실패에 종속되지 않기 위한 뜀박질의 전략이다. 지금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 사람, 결과, 조건을 빨리 인정할 때,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다.


"현실을 빠르게 인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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