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르소나 Oct 08. 2024

#34. 퐁피두 센터

내 선택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선택된다.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도착한 나는 퐁피두 센터 광장 앞에 앉아서 다이어리를 꺼냈다. 수없이 썼다가 지웠던 글자들 사이로 한 글자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후회. 나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이곳에 앉아 있다. 솔직히 어떤 것을 후회하고 무슨 미련이 남아서 이곳까지 왔는지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랑에 대한 감정에 충실하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낯선 곳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곳에 있는 것일까?" 라는 물음은 "내 선택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선택된다."라는 선택의 역설적 상황을 깨닫게 해주었다.  


검은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바지를 입은 그녀가 짙은 검은색 긴 머리를 흩날리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수백 미터 떨어진 거리지만, 나의 감각은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향했다. 크게 소리치지 않아도 귀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반응하고 있었고, 눈은 어떤 대답도 듣지 못했지만, 눈물로 가득 차 있었다. 심장은 금방이라도 떠질 듯 심하게 요동치면서 내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녀가 100미터 앞까지 왔다. 더 분명하게 그리고 더 선명하게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점점 그녀가 나에게 다가올수록 그녀를 만난다는 생각에 현기증이 몰려온다. 드디어 그녀가 내 눈앞에 서 있다.


"여기가 어디라고 온 거야?"


"얼굴 한 번 보고 가려고."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는데, 그녀가 나의 오른팔을 잡는다.


"가지 마."


사랑은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정의하는 순간 "무(無)가 된다." 사랑은 처음부터 일방적일 수 없다. 나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어떤 방식으로도 내 감정을 표현한다고 해도 상대가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면, 그것은 공허한 몸짓에 불과하다. 먼저 고백한 사람의 사랑이 자신이 할 수 있는 표현의 전부라고 소리쳐도 소용없다. 일방적인 사랑은 언젠가는 어긋나게 되어있다. 사랑은 두 개의 가슴이 하나의 감정으로 모이는 것이기에 어느 한쪽의 노력으로 채워질 수 없다. 두 개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움직여야 한다. 이 움직임은 무엇을 얻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가 아니라, 무엇에 이끌리는 감정의 현상으로, 나의 사랑은 너의 사랑으로만 완성할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나와 너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되면, 나는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낯선 감정을 갖게 되고 "이것이 진짜 사랑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사랑은 좋아하는 순서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있게 감정을 교류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되고, 감정은 내 의도와 판단이 아니라 너의 반응으로 공감받을 수 있고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다. 그러면 비로소 사랑이라는 운명 교향곡의 슬픈 멜로디에 귀 기울일 수 있게 된다.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이란 없다. 모든 헤어짐은 눈물이고 아픔이다. 첫사랑은 처음 사랑이기에 아픔이 더 혹독한 법이다. 먼저 사랑앓이를 한 이들의 조언처럼, '아픈 만큼 성숙'하기 위해서는 헤어짐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아픔이 나를 성숙하게 만들 기회로 삼아야 한다. 나는 그랬다. 내 사랑 고백과 표현이 일방적이었을지라도, 최선을 다하는 선택은 나에게 어떤 결과도 인정하는 방법을 알게 해주었다. 나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나는 미국으로 떠나기 한 달 전에 프랑스로 떠난 것이다. 아름다운 사랑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었다.


내가 미국으로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OO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비록 전화와 채팅으로 연락을 이어갔지만, 우리의 관계는 일 년 동안 아무런 문제가 없이 발전하는 듯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OO는 연락을 끊었고, 몇 개월이 지난 후, 나는 대학교 동기로부터 OO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OO가 결혼할 사람은 프랑스 유학파로 한국에서 알아주는 유명한 화가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처음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어이도 없고 화가 많이 났지만, 프랑스를 떠날 때만큼의 아픔은 아니었다.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고, 내 사랑이 아름답게 끝나지 않을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 있었다. 나는 어떤 결과도 빨리 인정하는 것이 제일 나은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첫사랑의 아픔으로 알게 되었다.


지금의 선택이 올바른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시간이 지나서만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이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현재 상황과 타협하지 않는 것이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찾아서 행동하고 또 행동해서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최선 이상을 포함해야만 한다. 정말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미련 없이 노력했는지를 자신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첫사랑을 찾아서 떠난 것처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했다고 자신할지라도, 찾고 또 찾아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후회의 씨앗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이렇게까지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다. 첫사랑은 나에게 후회하지 않는 삶은 뒤 돌아보지 않는 것이고, 뒤돌아보지 않으려면 미련 없이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나에게 첫사랑은 분명 아픔이었지만,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려주었다.

이전 04화 #33. 노트르담 대성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