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선택은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다.
이별의 아픔으로 가슴이 잿더미가 된 지 삼 개월이 지났다. 아무런 목적 없이 교보문고를 돌아다니는데,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 코너가 하나 들어왔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행 출판사 OO 플래닛이 '세계 여행 베스트 10'이라는 주제로 여행 안내서를 홍보하고 있었다. 나는 무엇인가에 이끌린 듯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러 나라 중에서 먼저 눈에 들어온 곳은 프랑스였다. 나는 책의 뒤쪽에 있는 지도를 펴서 파리 리옹역(Paris Gare de Lyon)이 어디 있는지 찾아봤다. 에펠탑(Eiffel tower)에서 센강(la Seine)을 따라 1시간 32분(67km) 정도 남동쪽으로 가면, 파리 식물원(Jardin des Plantes) 건너편에 리옹역이 있었다. 내가 이 역을 찾은 이유는 OO에게 온 편지의 주소가 리옹역 근처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곳의 위치를 확인한 후, OO가 한국에 머무는 동안 이야기했던 장소들을 지도에서 하나둘씩 찾으면서 OO와 함께 파리를 걷는 상상을 했다.
눈 내리는 밤하늘, 샹젤리제 거리 앞에는 아름답게 장식한 크리스마스트리가 줄지어 서 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한 연인이 눈에 들어온다. 남자는 눈빛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여자는 미소로 화답하고 있다. 그때 그들의 사랑을 축하하는 듯, 샹송이 흘러나온다. 남자는 여자의 손을 살며시 움켜쥐면서 그녀의 눈을 바라본다. 눈물이 흐른다. 그녀가 우는 것인지, 남자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여자가 발걸음을 옮긴다. 말없이 둘은 파리에서 가장 넓은 광장인 콩코르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을 지나간다. 우측으로는 마네의 튈르리 정원의 음악회로 유명한 정원(Jardin des Tuileries)이 나온다. 여기서 연인은 잠깐 서서 노부부와 흰색 강아지 한 마리가 여유롭게 밤 산책하는 모습에서 자신들의 노년 모습을 상상한다. 센강을 따라서 걷다 보니 어느새 빅토르 위고의 집이 있는 보쥬 광장(place des vosges)에 도착한다. 남자는 이내 아쉬운 마음이 든다. 얼마 가지 않으면 리옹역이 나오기 때문이다. 벌써 마음이 저려온다. 이별은 상상만으로도 아프다.
그날 저녁 나는 프랑스 여행 안내서를 정독했다. 프랑스는 어떤 나라이고, 유명한 관광지는 어느 곳이 있으며, 여행 비용과 숙소 그리고 파리를 관광할 때 무엇을 유의해야 할지 알게 되었다. 책을 덮고 생각해 봤다. 프랑스 여행을 갈 것도 아닌 데, 왜 이 책을 샀고, 오랜 시간 동안 책을 읽은 이유를 말이다. 그러자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최선'이었다. 검정고시 이후 나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도 최선을 다하면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다. 첫사랑도 마찬가지로 생각했다. 지금 힘들어하는 것은 사랑을 얻기 위한 노력과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직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남아있다고 판단했고,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황까지 나 자신을 몰아붙이지 못한다면, 나중에 지금의 상황을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프랑스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새벽 2:00 나는 OO express에서 9박 10일 일정으로 파리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여행 기간을 십일로 잡은 것은 특별한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혹시라도 연락이 안 되면, 최대한 기다릴 수 있는 기간을 그 정도라고 생각해서였다. 나에게 십일은 대단히 중요한 시간이었다.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준비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에 최선을 다 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후회와 미련으로 유학 생활을 잘 해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OO에게 연락하지 않은 채, 20**년 7월 14일 저녁 12:00 에어 프랑스에 몸을 실었다.
파리에 도착한 다음 날 나는 OO에게 메일을 보냈다. "지금 파리에 있다. 얼굴 한 번만 보고 다시 한국에 가겠다."라고 짧은 글을 써서 보냈다. OO가 메일을 확인하기 전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프랑스에 관광하러 온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한국인이 운영한 민박집에서 하루 종일 누워있었다. 저녁이 되자 민박집에 묵고 있는 사람들이 파티를 열었다. 왜 파리에 왔고, 어떤 나라를 여행했는지 서로 늘어놓았다. 스페인에서 돈을 분실할 뻔한 남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여행 도중 경찰 한 명이 자신에게 와서 위조지폐를 검사하고 싶다고 하면서 돈을 보여 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여행하기 전에 위조지폐를 빌미로 밑장 빼기 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었고, 현장에서 그 사람을 잡아서 경찰관에게 넘겼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순간 나는 머리가 번쩍였다. 내가 튀르키예에서 수백 달러를 분실한 이유는, 바로 그 두 명의 경찰관, 아니 절도범의 밑장 빼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짧은 현기증을 겪고 나서 그때의 아픔을 떠올렸다.
내 순서가 왔다. 사람들은 궁금한 눈빛으로 내가 왜 파리에 왔는지 알고 싶어 했다. 다른 여행자들과 달리 표정이나 복장이 남들과 달라 보였기에 그들은 나에게 관심이 많았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와인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의 정적이 흐른 후,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여자 한 분이 갑자기 큰 소리를 외쳤다. "아, 저 알 것 같아요. 첫사랑 때문에 오셨죠?" 그러자 주변 사람들은 설마 하면서 나를 더 궁금한 모습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다고 말하면서 OO에게 연락하지 않은 채 파리에 왔고, 오전에 OO에게 메일을 보낸 후 답장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정말 대단하다." "영화에서만 볼 것 같은 사람을 직접 보니 신기하다." "나도 그런 사랑을 받고 싶다." 등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들만 그들은 서로 신나서 떠들어 대고 있었다. 다음 날 나는 프랑스 리옹역을 찾아가려고 했기에 숙소 사람들에게 먼저 잠을 자겠다고 청했지만, 그들은 사랑의 주인공이 먼저 잠을 자면 안 된다고 연신 나에게 더 있어 달라고 간청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하지만 잠을 잘 수 없었다. 새벽에 확인한 메일에서 OO에게 답장이 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새벽 5:00에 일어났다. 아침을 먹지 않고 일찍 움직이는 나에게 민박집 주인이 물었다. "왜 이렇게 일찍 나가요? 무슨 일 있으세요?" 나는 어제 OO에게 답장을 받았고, 오늘 OO를 만나기로 했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주인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정말요! 축하해요. 잘 되실 거예요."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민박집을 나섰다. 새벽에 답장을 확인한 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잠도 잘 수 없었고, 물도 마시면 헛구역질이 났다. 결국 나는 센강 주변을 걸으면서 마음을 진정시킨 후 시간에 맞춰서 장소에 가려고 일찍 나섰다. 한 시간이 지난 후 나는 무거운 여행 가방을 메고 센강에 비친 나 자신의 모습을 봤다. 그 모습은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ess)에서 나오는 크리스천(기독교인)이 장망성(the city of destruction)을 떠나서 쁄라(beularh 결혼)의 나라로 향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왜 파리까지 왔을까? 어떤 후회가 두려워서 무거운 짐을 메고 이곳에 서 있는 것일까?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어디선가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근원은 노트르담 대성당(Paris' Notre-Dame Cathedral)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달려갔다. 신과 담판을 짓고 싶었다. 이 사랑이 나에게 허락된 것인지 아닌지를 묻고 싶었다. 성당 안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었다. 나는 성당 중간의 오른쪽 가장 끝자리에 앉아서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내가 지금 이곳에 온 이유는 당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사랑 때문이라고, 그 사랑을 당신이 나에게 주셨으니, 결과도 당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신에게 따졌다. 그렇게 세 시간 기도가 아닌 하소연을 늘어놓는 사이 스테인드글라스에서 한 줄기 빛이 나를 비췄다. 눈을 뜨고 빛이 들어오는 창을 쳐다보니, 성경책을 들고 있는 이름 모를 성자의 손에서 한 줄기의 빛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신이 나에게 계시의 말씀을 하시는 듯 보였다. 나는 한 동안 그림을 바라본 후, 다시 눈을 감고 계시의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했다. 정말 신이 살아계신다면, 나에게 이 사랑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잔잔한 노래가 성당 안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하면서 새벽 미사를 알렸다. 나는 미사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신에게 고해성사를 드리면서 임재범의 고해를 기도문 삼아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