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상상력에서 과학적 호기심으로

조선의 매미를 찾아서 4 - 매미에 대한 과학적 관심의 시작

문학적 상징에서 생태학적 탐구로

앞 장에서 우리는 조선 선비들의 문학작품 속 매미를 만났다. 김극기(1497~?)의 섬세한 시구에서 시작하여, 정일당 강씨(1623~?)의 감성적인 산문, 그리고 정약용(1762~1836)이 남긴 《소서팔사(蕭庶八事)》까지. 매미는 조선 문학의 중요한 소재로 자리 잡았다. 이들 작품에서 매미는 단순한 곤충을 넘어선 상징적 존재였다. 여름의 뜨거운 햇살 속에서 울려 퍼지는 맑은 소리는 선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별의 아쉬움, 고독한 내면의 반영, 세월의 무상함을 표현하는 감정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예를 들어, 김극기의 시에서는 "매미 울음에 한여름의 쓸쓸함이 깃든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자연의 소리가 인간의 정서를 증폭시키는 매개체로 기능한 것이다. 매미 소리는 마치 자연과 인간의 감성이 조화를 이루는 하모니처럼, 조선 문학의 정서를 담아내는 핵심 요소였다.


그러나 선비들의 시선은 매미의 외형이나 생태적 특성에는 머무르지 않았다. 매미가 어떤 신체 구조로 소리를 내는지, 왜 오직 여름에만 나타나는지, 어떤 나무를 선호하며 서식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호기심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들에게 매미는 철학적·문학적 상징으로서의 가치를 지녔을 뿐, 생물학적 존재로 다뤄질 필요가 없었다. 이는 매미를 '오덕(五德)'—문(文, 학문과 예술), 청(淸, 깨끗함), 렴(廉, 청렴), 검(儉, 검소), 신(信, 신뢰)—의 화신으로 보는 유교적 세계관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유교는 자연을 인간의 도덕적 본보기로 해석하려 했고, 매미는 그 이상적인 덕목을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졌다. 예를 들어, 매미가 나무 위에서 껍질을 벗고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은 청렴과 갱신의 상징으로 해석되었고, 그 맑은 소리는 문인들의 고결한 정신을 대변했다. 이러한 상징성은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1770)와 같은 문헌에서도 반복적으로 강조되었다.


이러한 문학적 묘사는 매미의 실제 생태와는 거리가 멀었다. 매미가 복부의 울림판을 통해 소리를 내는 기계적 구조, 지하에서 수년간 유충으로 지내다 여름에 우화하는 생애 주기, 또는 떡갈나무와 같은 특정 수종을 선호하는 서식 환경에 대한 질문은 문헌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선비들의 관심은 철학적·윤리적 해석에 머물렀고, 매미는 자연의 일부라기보다는 인간의 도덕적 거울로 기능했다. 이는 조선 사회가 자연을 실용적이거나 과학적으로 탐구하기보다는, 도덕적 교훈을 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춘 결과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조선시대 매미의 실제 생태 정보를 찾기 위해 우리는 실용서, 과학서, 백과사전류 문헌 등 다양한 산문 문헌을 샅샅이 뒤져야 했다. 이 과정에서 실학자들의 기록이 새로운 빛을 발하며, 매미에 대한 과학적 호기심의 씨앗이 드러났다.


조선의 과학적 성취와 한계

조선 시대는 실용 과학 분야에서 놀라운 성취를 이루었다. 세종대왕(13971450)은 천문학적 관측 도구인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여 달력의 정확성을 높였고, 이를 통해 농업 일정과 행정적 계획을 정교화했다. 예를 들어, 혼천의는 달과 별의 움직임을 계산하여 《칠정산》(七政算, 1444)을 완성하는 데 기여했다. 《농사직설》(農事直說, 1429)은 벼농사의 종류, 토양 관리법, 비료 사용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농민들의 삶을 개선했다. 세종대왕은 혼천의, 자격루, 측우기, 양부일구 등 다양한 과학 도구 및 《농사직설》, 《칠정산》 등의 과학저술까지 완성하였다는 점에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발전을 균형있게 추구한 왕이었다.

허준(15391615)이 집필한 《동의보감》(東醫寶鑑, 1613)은 동아시아 전통 의학을 종합한 백과사전으로, 질병 치료법과 약초 사용법을 상세히 기록하며 후세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정조(1752~1800)는 규장각을 설립하여 학술 연구를 장려했고, 그의 치세 동안 편찬된 《대동지지》(大東地志, 1864)는 지역별 지리, 자원, 인구를 체계적으로 기록하여 행정 효율성을 높였다. 이러한 성취는 조선이 실용적 지식을 중시한 학문적 전통을 보여준다.

세종대왕은 혼천의, 측우기 제작과 《칠정산》, 《농사직설》 편찬을 통해 천문학과 농업 기술을 혁신하여 국가의 실용적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생물학, 특히 곤충의 생태적 특성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눈에 띄게 부족했다. 이는 조선 학문이 국가와 백성의 생존에 직결된 실용성에 초점을 맞춘 결과였다. 천문학은 농업과 달력 제작에, 의학은 질병 치료에, 지리학은 행정과 국방에 직접적인 기여를 했지만, 곤충과 같은 소규모 생물은 실생활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문적 관심 밖에 있었다. 매미는 《동의보감》에서 유충이 우화하며 남긴 허물인 선퇴(蟬退)의 약용성—주로 해열제나 진정제로 사용—으로만 언급될 뿐, 그 생태적 특성에 대한 깊은 탐구는 없었다. 이는 조선 의학이 중국의 《본초강목》(本草綱目, 1596, 이시진)을 크게 의존한 데서 비롯된 한계이기도 하다.


곤충은 식량 자원으로서의 가치가 낮게 평가되었고, 오히려 해충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메뚜기나 잠자리는 농작물을 해치는 존재로 여겨졌고, 매미는 상징적 의미 외에 실용적 관심을 끌지 못했다. 따라서 학자들은 곤충의 생태를 탐구할 동기를 찾기 어려웠다. 예외적으로 정약전(1758~1816)이 편찬한 《자산어보》(玆山魚譜, 1814)는 물고기의 종류, 서식지, 생태를 체계적으로 기록한 사례로 주목받는다. 이는 물고기가 식량 자원으로서의 실용성이 높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 세대의 이러한 무관심은 후세대가 자연 과학적 호기심을 키울 기반을 제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실학의 등장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을 가져왔다. 실학자들은 만물에 대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백과사전류 문헌을 남기며, 자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었다.


실학자들의 백과사전적 열정

실학은 조선 후기 학문의 혁신을 이끈 흐름이었다. 이수광(1569~?)의 《지봉유설》(芝峯類說, 1614)은 생물, 풍속, 기술을 아우르며 백과사전의 기초를 닦았다. 이 책은 조선의 자연과 문화를 체계적으로 기록하려는 첫 번째 시도로, 동식물의 이름과 용도를 상세히 다루었다. 예를 들어, 그는 산삼의 생육 조건과 약효를 기록하며 실용성을 강조했다.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 1740년대)은 천문, 지리, 동식물, 사회 제도를 포괄하는 방대한 저작으로, 실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규경(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1830년대)는 매미의 오덕을 상징적 맥락에서 재해석하며, 조선 선비 사회의 철학적 기반을 강화했다. 이 백과사전은 서양의 천문학, 지리학, 기술까지 흡수하여 시대를 앞선 지적 호기심을 반영한다.


이덕무(1741~?)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18세기 후반)는 실용과 자연을 종합한 작품으로, 농업 기술부터 생활 지혜까지 아우른다. 예를 들어, 그는 논밭의 배수 시스템 개선법을 제안하며 농업 생산성을 높이려 했다.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1770)는 제도, 문물, 역사를 체계화하여 행정과 학문의 가교 역할을 했다. 권문해(1716~?)의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1589)은 어휘와 사물의 기원을 탐구하며 언어학적 기여를, 이형상(1652~?)의 《남환박물》(南宦博物, 1704)은 제주도의 독특한 생태를—예를 들어, 제주 말의 기원을 추적했다—, 홍만선(1643~?)의 《산림경제》(山林經濟, 17세기 후반)는 농업과 목축, 생활 기술을 상세히 기록했다. 이들 문헌은 실학자들이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자연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이들 실학자들이 남긴 문헌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매미 생태에 대한 기록이 놀랍게도 발견되었다. 이익의 《성호사설》은 매미가 빛에 끌리는 습성을 간접적으로 언급하며 포획법을 제시했고, 임성주의 《녹문집》(麓門集, 1789년),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1830년대)는 매미 울음소리 발생 원리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담았다. 조선 전기나 중기와 달리 후기 실학자들은 매미의 상징성보다는 그 생태적 특성에 대한 호기심을 키웠다. 이는 실학의 실사구시 정신—현실을 보고 실용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태도—이 자연 과학으로 확장된 결과였다.


1740년대: 이익의 《성호사설》 – 매미 포획과 식용의 실용서

조선 후기 실학의 거장 이익(1681~1763)은 성호라는 호로 불리며, 조선 학문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는 젊은 시절 관직에 올랐으나, 곧 벼슬을 내려놓고 학문에 전념했다. 그의 집은 지식의 용광로였다.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 성호학파라는 실학의 별자리를 형성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東史綱目, 1778년)으로 역사학에 새 지평을 열었고,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 1751년)로 지리학의 깊이를 더했다. 박지원과 박제가는 북학파를 이끌며 실학 문학과 서양 문물을 도입했고, 이덕무는 문학과 실학을 융합하여 다채로운 업적을 남겼다. 이들은 조선 사회에 실학의 씨앗을 뿌렸고, 개혁과 발전의 꿈을 키웠다.


이익의 저서 《성호사설》(1740년대, 26권)은 조선 후기 백과사전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이 책은 천지문(천문과 지리), 만물문(동식물과 자연), 인사문(정치와 사회), 경사문(유교와 역사), 시문문(문학과 예술) 등 다섯 부문으로 나뉘어, 세상 만물을 포괄적으로 탐구했다. 이익은 실사구시 정신을 바탕으로 조선의 현실을 꿰뚫었고, 서양의 천문학, 역법, 지도 제작법에 주목하며 시대를 앞선 통찰을 보여주었다. 특히 만물문은 그의 호기심이 펼쳐지는 무대로, 동식물, 사물, 자연현상을 자유롭게 다루며 지적 탐구의 깊이를 드러낸다.


이익은 생물 분류학적 체계를 수립하지는 못했지만, 생물의 이름과 습성을 정확히 기록하고, 기존 문헌의 오류를 꼼꼼히 검토했다. 그는 서양의 과학기물을 높이 평가하고, 갯벌의 바닷게 종류를 세밀히 관찰하며, 석회의 제습·보습 성질을 실험적으로 탐구했다. 이러한 태도는 당시 사변적 성리학 지형 속에서 근대적 자연과학적 접근을 시사한다(심경호, 2020; 김일권, 2011).

성호사설(성호선생사설 제4권) 만물문.jpg 성호사설 만물문의 '곤충가식' 원문

"곤충가식": 매미를 먹는 관습의 확인

《성호사설》의 만물문(성호선생 사설 제 4권)에 실린 "곤충가식"은 조선시대 식용 가능한 생물을 탐구한 글이다. 이익의 실사구시 정신이 담긴 이 항목은 매미를 포함한 곤충, 지렁이 등 다양한 동물의 식용 풍습을 다룬다. 그는 《회남자》(기원전 2세기)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以火耀之(이화요지) 불로 빛을 비추면

則蟬聚而至(즉선취이지) 매미가 모여든다


이 원문은 《회남자》에서 인용된 것으로, 매미의 광반응성을 활용한 포획법을 보여준다. 《회남자》는 중국 전국시대 한나라 장사왕 유안(劉安, ?~기원전 122)이 편찬한 도가 사상과 자연학을 담은 백과사전적 저서로, 21편 8만 자에 달한다. 유안은 한 고조 유방의 손자로, 황제의 통치 철학을 강화하기 위해 문인 200여 명을 동원하여 이 저술을 완성했다. 21편은 도가 사상(노자·장자)을 기반으로 우주론, 정치학, 자연학, 윤리학을 다루며, 자연 현상(기상, 동물, 식물)을 설명하는 부분이 많아 후대 백과사전의 원형으로 평가받는다.


《회남자》는 매미가 빛에 반응하는 특성을 활용한 포획법을 기록했는데, 이는 매미가 밤에 횃불을 태양으로 오인하고 모여드는 생태적 습성을 반영한다. 현대 매미 생태학에 따르면, 매미는 30룩스 이상의 조명에서 야간 활동성을 유지하며 빛에 끌린다. 이는 도심의 가로등 근처에서 밤에도 매미가 울어대는 현상과도 연결된다. 중국에서는 이 방법을 이용해 매미를 채집했으며, 조선에서도 비슷한 방식이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의 매미 포획법: 백자도와 횃불의 비밀

이 기록은 조선에서 횃불(홰)로 매미를 잡았음을 시사하며, 현대 과학과 일치한다. 그러나 조선의 일반적인 매미 포획법은 백자도(자손 번영을 상징하는 민화)에 그려진 장면에서 엿볼 수 있다. 백자도에는 아이들이 매미를 잡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데, 여기서 사용된 도구는 서양식 포충망이 아닌, 둥근 채에 거미줄같은 접착성이 강한 실을 감아 만든 전통적인 곤충채였다. 실제 이 방법에 대해 필자보다 나이 많으신 어른들이 기억하는 매미 채집법이다. 이 방법은 소규모로 한두 마리씩 잡기에는 적합했으나, 식용을 위해 다량의 매미를 확보하려면 효율성이 떨어졌다.

성호사설 횃불로 매미잡는 사람들.png

그렇다면 왜 밤에 잡았을까? 실제 조선에서도 밤에 횃불로 매미를 잡았을까? 낮에는 태양광이 강하게 비치며 매미를 유인하기 어렵지만, 밤에는 해가 없어 횃불만 켜도 매미가 빛에 반응하며 모여든다. 이는 식용을 위해 충분한 양의 매미를 확보하려는 실용적 선택으로 보인다. 낮에는 개별적인 포획이 가능하나 대량 채집을 위해서는 빛으로 유인할 수 있는 밤이 더 유리했을 것이다. 횃불은 밤의 어둠 속에서 유일한 광원으로 작용하여 매미를 효율적으로 끌어모았다. 조선의 농촌에서는 이러한 방법이 가뭄이나 흉년 때 보조 식량을 확보하는 데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익의 실학적 태도를 고려할 때, 그는 단순히 《회남자》를 인용한 것이 아니라, 민간에서 횃불로 매미를 잡는 생활방식을 관찰하고 이를 검증하기 위해 중국 문헌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학자로서 현장을 중시한 그의 접근은, 조선에서도 야간 횃불 포획이 행해졌음을 시사한다. 《회남자》에는 매미를 잡는 방법 외에도 다양한 매미 생태에 대한 지식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익은 오로지 포획방법만 《회남자》를 인용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도 실학의 실사구시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단순한 성리학자가 아니라 실사구시를 중시한 이익은, 민간의 경험적 지식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려 했음은 분명하지만 실생활에 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 매미의 일반적인 생태 지식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실사구시의 철학에서 보면 조선의 농촌에서는 식량 부족 시 곤충을 보조 식품으로 활용한 사례가 빈번했으며, 이는 이익이 현장에서 목격했을 가능성을 높인다.


그렇다면 매미 생태에 대한 지식을 담은 최초 문헌은 무엇일까? 《성호사설》은 매미의 생태 지식을 체계적으로 다루기보다는 포획과 식용 습관을 다룬 실용서에 가깝다. 과학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매미 생태에 대한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인물이 있었으니, 그 주인공은 바로 임성주가 쓴 《녹문집》이다. 그의 탐구는 매미 소리의 비밀을 풀기 위한 첫걸음으로, 조선 실학의 과학적 호기심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매미 소리의 비밀을 좇다: 조선의 호기심 여정

이익의 《성호사설》은 매미의 생태를 깊이 파헤치지 않았다. "곤충가식"은 먹을 수 있는 생물을 포괄적으로 다루며, 매미의 빛에 대한 반응은 횃불을 이용한 포획법에서 간접적으로 유추될 뿐이다. 조선시대 문헌에서 매미처럼 실용 가치가 낮은 곤충의 과학적 탐구 기록은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임성주의 《녹문집》은 이 예상을 뒤엎는 보석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이 문헌은 매미의 울음소리에 푹 빠진 조선 사람들의 호기심을 생생히 보여준다.


조선 사람들은 매미의 맑은 소리에 매료되었다. 농경사회에서 매미 소리는 여름의 상징이자 유교적 덕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그 청아한 울음은 선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일부는 그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에 대한 생태적 호기심을 키웠다. 특히 임성주와 같은 성리학자는 매미의 오덕에 익숙했을 터인데, 왜 유독 매미 소리에 대한 궁금증을 문집에 기록했을까? 《녹문집》은 마치 논문의 연구 문제를 던지듯 매미 소리의 기원을 탐구하는 출발점을 제시한다. 이 호기심은 조선 선비들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관찰력을 드러내며, 매미의 식용문화와 횃불 포획법에서 비롯된 실용적 관심을 생태적 질문으로 확장시킨다.


과학적 질문의 시초: 임성주의 호기심과 한계

임성주의 《녹문집》에 실린 「선설」(蟬說)은 조선 후기 학문적 호기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임성주(任聖柱, 1711~1788)는 조선 후기의 독특한 인물로, 본관은 풍천, 자는 중사, 호는 녹문이다. 그의 삶은 '은거의 철학자'라 할 만했다. 1733년 사마시에 합격해 관료의 길을 걸었으나, 1750년 세자익위사세마에서 시직으로 승진한 후 곧 사직했다. 1758년, 47세에 공주의 녹문으로 은거하며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정조 즉위 후 잠시 동궁을 보도하고 지방관을 지냈으나, 다시 은거 생활로 돌아갔다. 이는 세속의 권력보다 학문과 자연에 대한 깊은 성찰을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임성주는 이재(李縡)의 문인으로 기호학파에 속했으나, 스승의 학설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초년에는 인물성동론을 주장했으나, 중년에 이르러 기존 학설을 비판하며 '기일분수설(氣一分殊說)'을 수립했다. 이는 기(氣)를 우주의 근본으로 보고, 모든 현상이 기의 분화에서 비롯된다는 철학으로, 전통 성리학의 이(理) 중심주의를 넘어섰다. 그는 추상적 원리보다는 경험 가능한 현상에 관심을 두었고, 이는 자연 관찰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그는 자연 현상을 기의 작용으로 해석하며, 매미 소리나 바람 소리에서 우주의 조화를 읽으려 했다. 이는 실학의 실사구시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녹문집》은 시, 산문, 논설, 서신 등을 아우르는 26권 13책으로, 1795년 동생 정주가 편찬한 것이다. 「녹려잡지」와 「산록」은 그의 자유로운 사색과 관찰을 담는다. 은거지에서의 고독한 삶은 자연에 대한 깊은 성찰을 낳았고, 매미 소리, 바람 소리, 물 흐르는 소리는 기(氣)가 작동하는 증거로 여겨졌다. 이는 추상적 도덕 원리보다는 구체적 현상을 탐구하려는 태도였다. 그런데 이 문집에 ‘선설(蟬說)’이라는 산문이 존재한다. 한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매미에 대한 이야기’이다. 과연 임성주같은 성리학자는 도대체 매미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그의 질문은 아주 단순하다. 매미는 왜 배에서 소리를 낼까?

녹문집 21권 선설 최종이미지.jpg 임성주의 문집 <녹문집>의 '선설(蟬說)' 원문

蟬鳴而聲出於背(선명이성출어배) 매미가 우는 소리는 배에서 나는 것 같다

凡天下有聲之物 皆以口出聲 而獨蟬之出於背何也(범천하유성지물 개이구출성 이독선지출어배하야) 세상의 모든 소리를 내는 생물은 입으로 소리를 내는데, 유독 매미만 배에서 소리가 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첫 번째 본인의 관찰 결과에 대한 이야기다. 매미 소리는 실제로 복부에서 난다. 현대 곤충학에 따르면, 수컷 매미의 복부에는 발음막(tymbal)이라는 특수한 기관이 있고, 이를 근육으로 진동시켜 소리를 만든다. 임성주는 귀로 들어 매미 소리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왜 이상한지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지적한다. 대부분의 동물은 입이나 목(성대)으로 소리를 내는데, 매미만 배로 소리를 낸다는 점이 특이했던 것이다.


豈出於口 而人特不知耶(기출어구 이인특부지야) 혹시 입에서 나오는데 사람들이 모르는 것인가

其為物也 微而不能具耳目口鼻之體耶(기위물야 미이불능구이목구비지체야) 아니면 매미가 너무 미물이라 입, 코, 귀, 콧구멍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것인가

여기서 임성주는 두 가지 가설을 세운다. 첫째, 실제로는 입에서 나오는데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인가? 둘째, 매미가 너무 작아서 입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것인가? 이것은 관찰한 현상에 대해 여러 가능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으므로 과학적 탐구의 전형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곧 그는 바로 유사 생물의 예를 통해 반박의 태도로 변한다


蚤虱虫蟻至瑣也而亦有口(조슬충의지쇄야이역유구) 벼룩이나 개미 같은 자잘한 벌레도 입이 있고

蚓蠐螬至蠢也而亦有口(인제조지준야이역유구) 지렁이나 굼벵이 같은 어리석은 벌레도 입이 있다

임성주는 비교 관찰법을 사용한다. 매미보다 훨씬 작은 벼룩, 개미도 입이 있고, 매미보다 단순해 보이는 지렁이, 굼벵이도 입이 있다. 따라서 매미가 작아서 입이 없다는 가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논리적인 추론이다. 현대 생물학적으로도 정확한 관찰이다. 매미는 모기처럼 주사바늘 모양의 구기(口器, mouthpart)가 잘 발달한 곤충으로, 특히 나무 수액을 빨아먹는 데 특화된 자침식(刺針式) 구기를 가지고 있다.


古人謂蟬飮露 其亦有口矣(고인위선음로 기역유구의) 옛사람이 매미가 이슬을 마신다고 했으니 입이 있을 것이고

여기서 임성주는 문헌 기록을 활용한다. 고대 문헌에 "매미가 이슬을 마신다"는 기록이 있으니, 매미에게 입이 있음은 분명하다는 논리다. 실제로 매미는 이슬이 아니라 나무 수액을 먹지만, 어쨌든 입(주둥이)이 있다는 결론은 맞다. 이 구절은 임성주가 자신의 관찰뿐 아니라 문헌적 증거도 함께 검토하는 논리적 결론의 추구하는 모습이다.


有口而聲出於背 然後為可異也(유구이성출어배 연후위가이야) 입이 있는데도 배에서 소리가 나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결론이다. 매미에게는 분명히 입이 있다. 그런데도 소리는 배에서 난다. 이것이 신기한 점이다. 임성주는 여기까지 매우 논리적으로 관찰하고 추론했다. 현대 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모든 관찰은 정확하다. 매미는 입이 있고, 소리는 배에서 나며, 이것은 매우 독특한 구조다.

그렇다면 임성주는 왜 더 나아가지 못했을까? 왜 복부를 열어보거나 내부 구조를 탐구하지 않았을까?


天厭世人之多口 而緘蟬口以為戒耶 吾於此有感(천염세인지다구 이함선구이위계야 오어차유감) 하늘이 세상 사람들의 떠드는 입을 싫어해서 매미의 입을 봉하고 경고로 삼은 것인가, 이에 대해 나는 감회가 있다

마지막 문장에서 임성주는 과학적 설명 대신 도덕적 교훈으로 마무리한다. 이것이 그의 한계였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의 한계라기보다는 성리학자로서의 정체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임성주는 기(氣)를 중시하는 철학자였지만, 여전히 성리학의 틀 안에 있었다. 성리학의 세계관에서 자연은 궁극적으로 도덕적 교훈을 주는 존재였다. 자연 현상을 관찰하고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허용되었지만, 그 끝은 결국 인간의 도덕으로 귀결되어야 했다.


매미가 입이 있는데도 입으로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사실은, 임성주에게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유교적 교훈으로 해석되었다. 하늘이 매미의 입을 봉했다는 것은 말이 많은 세상 사람들에 대한 경고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을 도덕의 거울로 보는 전형적인 유교적 해석이다. 임성주가 매미를 해부하여 내부 구조를 관찰하지 않은 이유는 자연을 분해하고 해부하는 것보다, 자연이 주는 도덕적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조선 성리학의 한계이자, 실학이 극복하려 했던 지점이었다.


그럼에도 임성주의 「선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매미 소리의 기원에 대해 체계적으로 관찰하고, 비교하고, 추론했다. 비록 마지막에 도덕적 교훈으로 귀결되었지만, 그 과정은 과학적 방법론의 초기 형태를 보여준다. 그의 질문은 《설문해자》 이후 1,700년 동안 침묵했던 매미 소리의 비밀을 다시 깨웠다. 그리고 그 질문은 후대 학자들에게 이어졌다.


매미 소리의 오래된 기록과 1700년의 침묵 《설문해자》

《설문해자》는 동한 시대 학자 서경(許愼)이 기원후 100년경에 완성한 중국 최초의 체계적인 문자 해설서로, 총 540부 9,353자로 구성되었다. 이 책은 한자의 기원, 형태, 음운, 의미를 상형 문자와 결합하여 설명하며, 여섯 가지 범주(육서, 六書)—표의, 지사, 회의, 형성, 전주, 가차—로 분류한다. 서경은 한자의 구조를 고고학적 유물과 고문서에서 추적했으며, 이는 당시 중국 학문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이 저서는 단순한 사전 이상의 역할을 했고, 후대 학자들에게 자연 현상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방법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蟬' 자는 '虫'에 '單'의 부수를 붙여 정의되며, "여름에 나무에 올라 울며, 소리가 배에서 나온다"는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 이 기록은 매미가 입이 아닌 복부에서 소리를 낸다는 사실을 관찰로 담고 있으며, 이는 간단히 귀 기울여 들어보면 확인 가능한 사실이다.


《설문해자》는 기원후 100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이는 매미 소리 발생의 독특한 특성이 이미 고대에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수많은 중국 문헌—예를 들어, 《회남자》(기원전 2세기), 《본초강목》(1596, 이시진), 그리고 《농정전서》(기원후 6세기)—에서도 매미가 배로 소리를 낸다는 언급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은 주로 관찰에 그쳤고, 매미가 배로 소리를 내는 메커니즘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탐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교적 세계관이 지배적이던 동아시아에서는 자연을 도덕적 상징으로 해석하는 데 더 관심이 쏠렸고, 생태적 메커니즘을 파헤칠 동기가 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임성주의 질문은 이 긴 침묵을 깨는 첫걸음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성리학자로서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그의 질문은 고대 기록을 재확인하는 수준에 머물렀고, 결국 도덕적 교훈으로 귀결되었다.


매미에 대한 탐구의 시작, 그리고 그 질문의 연속

임성주의 탐구는 비록 그가 성리학자이긴 하지만 이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아주 기본적으로 가질 수 있는 질문을 담고 있다. 매미 포획과 식용에 초점을 둔 이익의 실용적 접근과 달리, 임성주는 매미 소리의 원리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의 질문은 《설문해자》가 기록한 고대 지식과 연결되며, 매미가 배에서 소리를 낸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성리학자로서의 한계로 인해 그 메커니즘을 더 깊이 탐구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그의 질문은 조선에서 매미 생태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를 시작한 의미 있는 시도로 평가되며, 후대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임성주가 뿌린 씨앗은 조선 실학의 자연 과학적 탐구로 이어진다. 그의 한계는 당시 학문적 조건에서 불가피했으나, 고대 문헌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 호기심이 조선의 과학적 탐구를 촉진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이 여정은 조선이 자연을 단순한 상징으로만 보지 않고, 그 본질을 이해하려는 태도로 나아가려 했음을 보여준다. 김극기의 시에서 매미는 이별의 슬픔이었고, 정일당 강씨의 산문에서는 계절의 무상함이었다. 하지만 《성호사설》에서 매미는 처음으로 '잡아서 식용으로 사용가는 한 식량‘이 되었고, 임성주에 이르러 '왜 배에서 소리가 나는가'라는 질문이 던져졌다. 상징에서 실체로, 그리고 메커니즘으로—이것이 조선 후기 매미 탐구의 여정이었다.


조선의 매미 연구는 서양의 근대 생물학에 비하면 초보적이었다. 체계적인 분류학도, 정밀한 해부학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장에서 만난 학자들—이익, 임성주—은 조선이 근대 과학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비록 그 가능성이 완전히 꽃피우기 전에 시대가 바뀌었지만, 그들이 뿌린 씨앗은 한국 과학사의 소중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우리의 조선매미 탐구 여행은 계속된다. 다음 장에서는 마치 선설에 화답을 하고 있는 듯한 정약용의 《선음삼십절구》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것이다. 30편의 칠언율시 안에 숨겨진 매미의 생태, 그리고 시인이자 과학자였던 한 인간의 집요한 관찰을 추적할 것이다.


<참고 문헌>

김일권. (2011). 성호사설 만물문의 실학적 만물관과 자연학. 동아시아고대학, (18), 3-59.

심경호. (2020). 『성호사설』의 생물지식 재편 시도. 한문학논집, (56), 147-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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