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력서 업데이트하다가 현타를 받은 잉여 인간
나는 직장인이었고 직장인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대단한 용기도 없고 수단도 없기 때문에 사회가 허락하는 한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욕망과 신분 (직장인-월급쟁이) 사이의 괴리감에 힘겨워하는 직장인답게, 누군가 직장인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글을 보면 눈여겨보곤 했다. 그래서 직장인이었던 사람들 또는 성공적인 직장인들의 글을 브런치나 이곳저곳에서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야, 어쩌면 이렇게 직장 생활을 잘하고 다들 자기 분야의 선수가 되었을까."
또는 가끔 실패한 직장 경력에 대해 돌아보는 글을 보더라도 아래와 같은 생각이 든다.
"이야, 그래 지금은 그만두었어도 후회 없이 멋진 그런 직장 생활을 했구나."
그렇다. 나 빼고 엄청 많은 사람들이 엄청 멋진 -소위 간지 나는- 직장 생활을 하고 있고 해 왔던 것이었다.
나는 나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 순간도 있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냥 평범하기 조차도 너무 힘들었던 그런 잉여와 평범 상이의 어디에 있는 경계인이었다.
아냐 너무 비하하지 말자. 나도 한번 표현해 보련다.
질문 : "자 우리 짱돌님, 짱돌님은 어떤 이력의 소유자이신지 한번 소개해주시겠어요?"
답 : "하하 이제 막 십육 년 정도의 경력을 채워왔습니다. 패션 인더스트리에서 커리어를 시작했고 글로벌 탑티어 럭셔리 브랜드에서 마케팅과 프로모션 기획을 리드했습니다. 지금은 새로운 회사에서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시장의 니즈를 발굴하고 혁신적인 고객 경험을 제공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하 눈물이 나려고 한다.
그래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월급쟁이였고 시키는 일하고 때로는 남들보다 조금 더 잘나 보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했던 일 중의 반은 비난과 방관 사이의 어느 지점의 리엑션을 경험했고 나머지 반의 반은 아무런 리액션도 없어서 홀로 부끄러워했고, 나머지 반은 마지못한 칭찬을 겨우 들어온 것 같다.
오늘 이력서를 한번 업데이트를 하려고 했다. 그래서 나 자신의 지금을 생각하게 되었고 과거를 돌이켜 보게 되었다. 그랬더니 아웅다웅 힘겹게 싸워봤자 그냥 나는 잉여였구나 싶더라.
회사가 주는 비전에 세뇌당하다 보면 그리고 여러 동료와 함께 고생을 하다 보면 분위기에 취할 때가 있다. 팀으로서 업무 몰입도가 최고조에 이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벽에도 줌에서 열변을 토하다 보면 인생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아주 바람직한 방향과 속도로 도로를 달리고 있는 것 같이 생각이 된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력서를 업데이트하면서 내가 바라는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나는 또 그냥 별것 아닌 존재 같고, 사실 또 누군가의 모습이 된다 한들 별 것도 아니다. 날밤을 새면서 짱짱하게 일을 했다 한들 그 동료들 가운데 승진한 어느 한 명 정도 만이 몇개월 정도 사기가 지속될 뿐이다. 결과물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면 회사의 입장에서는 제법 그럴듯한 것도 있다. 그런데 막상 나 자신이나 다른 동료들에게 개인적으로 남겨진 결과물을 생각해 본다면 그 수많은 밤샘은 그저 365일 밤 중의 하룻밤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별 볼 일이 없다. 그냥 이런 것이다. 만약에 누군가 승진한다면 한번 더 취해서 "그래 한번 우리 다시 달려봅시다." 하는 정도가 아닐까?
일을 대충 해서 본전이라도 찾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 수많은 월급쟁이 친구들은 아시겠지만 직장 생활이라는 게 아무리 월급을 보고 일을 한다고 하지만 스스로 취하지 않거나 적어도 조그만 재미조차 없으면 정말 월급만 보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기왕 하는 것, 할 때는 한번 취해서 쭉 나 자신을 일에 담가보는 것도 좋다.
그런데 오늘 이력서를 업데이트하다 보니 나는 일에 나를 담가놓고 내 인생에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착각을 했던 것 같다. 즐겁고 열심히 일을 해본 것은 좋은데 그 외에 무엇하나 나를 챙겨준 것이 없다. 일을 잘하기 위해선 새로운 것을 배워도 보고 도전이라는 것을 하는데 나의 하루하루를 완전하게 만들고 인생을 충만하게 만들기 위해서 무엇 하나 챙겨서 한 것 (예를 들면 혼자 노는 방법, 아내와의 취미 생활, 제2의 직업이 될만한 취미 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고작 이력서를 한번 업데이트하면서 인생을 돌아보는데 이렇게 현타가 오는 것이겠지.
그래서 결심했다. 나 자신을 조금 더 채워가기로. 너무 뻔한 결론이긴 한데 나는 지금 진지하다.
요즘 나에 대한 회사의 인정, 인식이 없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일을 잘하려고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게 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신경 쓰는 것은 남들의 시선이요 눈에 밟히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뿐이었다. 그런데 어떤가, 난 그냥 잉여이다. 행복한 잉여로서 이만큼 성공적으로 살아왔는데, 앞으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그런 비교와 시기 질투의 한가운데로 자꾸 스스로를 몰아넣을 필요가 있는가? 이력서를 펼쳐놓고, 지나온 날을 곱씹고 미래를 그리다 보니 이제야 좀 맘이 편해졌다.
한 걸음씩 가자. 일을 일대로 잘해보자. 길고 긴 시간 회사에서 보내는데 그 일이 재미 없어지면 큰일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우리 팀이랑) 가면 될 일이다. 그리고 이력서도 잘 써보고, 이제 시즌이니 좋은 회사가 있다면 한번 들이밀어 볼 일이다. 끝으로 회사와 회사의 인정에 대한 열망으로 꽉 차 있던 나의 삶의 구성를 크게 바꿔봐야 할 것 같다. 회사 말고 중요한 것을 만들어야 하는데, 솔직히 그것은 조금 더 고민하고 찾아봐야 할 것 같다.
헛짓거리는 하지 말자. 이제 헛짓거리는 하지 말고 한걸음 한걸음 무겁고 진중하게 디뎌야겠다.
잘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