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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유숙 Jan 11. 2019

노견과 함께 걷는 골목길

노견이 주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내 생애 대형견을 꼭 한 번 키우고 싶다는
로망을 실현한 날!


나는 당황했다.

분명히 분양업자에게 '50일 된 가정견'이라고 들었는데, 꼬불꼬불 찾아간 곳은 허름한 개농장!


그곳에서 만난 래브라도리트리버 아가는 귀엽지만 꼬질꼬질한 모습에 똥밭에서 뒹굴다 온 녀석처럼 온몸에서 구리구리한 냄새가 났다. (추측 건데, 매우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자신의 변을 먹고 컸던 것 같다. 너무 배가 고파서...

집에 와서도 한동안 응가를 맛있게 먹어치워서 식분증을 고치느라 애를 먹었다.)

개농장에서 구출(?)해온 날! 바로 목욕시키면 안 되는데, 너무 냄새가 심해 씻겼다.

분양업자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를 데려가세요! 제발!'이라고 애원하는 듯한 눈빛과 쉴 새 없이 흔들어대는 꼬리가 마음에 꽂혀 가족으로 맞았다. '루피'라는 이름을 붙여서!

장난기 많던 시절의 강아지 루피

그렇게 가족의 일원이 된 루피는 대형견과 함께 산다는 건 낭만이 아니라 현실임을 매일매일 깨닫게 해 주었다.


사시사철 개털 옷을 입고, 개털 밥, 개털 국을 먹어도 '그러려니~'하는 마음으로 허허 웃어넘기고, 엄청난 먹성과 양육 비용에 '억!'소리가 나도, 넘치는 기운을 통제하느라 체력이 바닥나도, 왕성한 호기심에 집안이 쑥대밭으로 변해도, 폭우가 몰아치는 밤에 산책을 나가자고 졸라도, 모두 모두 감수하고 견뎌내야 하는 현실임을...


특히, 루피가 에너자이저급 체력을 자랑하던 시기에 골목길을 산책하는 건 정말 힘들었다.


외양만 순한 맹인 안내견이고, 실제는 천방지축 사고뭉치견이었기 때문에 대문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집 현관문을 들어서기까지 그야말로 초긴장의 고행길이었다. 신이 나서 이리저리 주인을 끌고 다니는 건 기본이고, 가끔은 고양이나 다른 개를 쫓아가느라 목줄이 끊어질 정도의 괴력을 발휘해 혼비백산한 적도 여러 번 있었으니까 말이다.

한쪽 눈이 먼 형 (레오, 잉글리시 코카스파니엘)의 길잡이가 된 시절의 루피...개신났다. "나를 따라오시개!"

그랬던 루피가 어느덧 10살 노견이 되었고,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처럼 매일의 산책 풍경도 많이 달라졌다.


녹내장과 암으로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은 루피는 주인이 올 때까지 얌전하게 조용히 자리에서 기다린다. 몇 시간이고 이런 자세로..    

내가 오면 반가운 소리가 나는 쪽으로 힘차게 꼬리를 흔들어대고,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운 아기처럼 한 발 한발 조심스럽게 걸어온다. 산책 나갈 기쁨에 겨워서...


햇볕 좋은 오후시간대에 주인의 목소리와 체취에 의존해 익숙한 골목길을 아주 천천히 느리게 한 바퀴 도는 게 전부인 산책길이지만, 루피도 나도 행복하다!


오늘 하루를 또 함께 살았으니...!


그리고 내일 또!

동고동락의 세월을 함께 보낸 나의 노견과 함께 골목길을 산책할 수 있는 행복이 주어진다면 속삭이고 싶다.


루피 너와 함께 걷는 이 길은
행복한 추억이 주렁주렁 가득한 인생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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