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빼앗은 건 카드지갑뿐이야 #4
저는 주민등록등본을 떼면 누구나 두 장씩은 나온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늘 두장씩 나왔으니까요. 그런데 조금 커서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두장이나 나오는 이는 만나보질 못했습니다. 알고 보니 저희 집이 너무 이사를 많이 다니는 바람에 장수를 넘어간 것이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여태껏 살았던 집을 다 기억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이사를 많이 다녔습니다. 그 때문에 전학을 두어 번 가야 했고 한 번은 부산에서 서울로 꽤 큰 변화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중학생이 되기 전에 겪은 일이었습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린 나이 덕에 이사를 하면서 힘들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이사를 가기 전, 짐을 쌀 때는 그저 평소에 하던 것보다 조금 더 조용히 있으면 되었고, 이사 갈 집에서 짐을 풀 때도 ‘그릇’이나 ‘컵’이라고 적힌 박스만 잘 피해 다니면 됐습니다. 그 정도만 해도 1인분의 몫은 충분히 해낸 것이었죠.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능력을 닮지 못한 덕에 저는 지독한 길치입니다. 그래서 동네 이름이 바뀌지 않는 선에서 이사를 가도 새로 길을 익히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한 번은 이사 전에 미리 예행연습을 했음에도 이사 갈 날에 길을 까먹고 이상한 곳에 간 적도 있었습니다)
낯섦이 익숙함으로 전환되는 시간 동안 몇 번은 길을 잃고 몇 번은 집을 나서길 주저했으며 또 몇 번은 그대로 주저앉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익숙해졌다 싶으면 다시 이사였습니다.
아이의 첫 이삿날이 찾아왔습니다. 4박 5일의 입원을 마친 우리는 2주 동안 지낼 조리원으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병원 생활을 좋아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익숙해진 곳이라 아쉬움 아닌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특히 병원을 나서기 전 날. 약간의 회복이 진행되어 어느 정도 걸을 수 있었던 당신은 최근 들어 가장 환하고 장난기 넘치는, 예의 평소의 그 표정으로 내게 말했습니다.
“나, 야간 수유 신청했어.”
밤에 잠을 자는 중간에 일어나 신생아실로 가서 아이에게 직접 수유를 하는 것을 신청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하는 당신의 표정을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가장 최근에 봤을 때 당신은 아마 두 줄이 선명한 테스트기를 들고 있었을 것입니다.
신이 난 당신의 표정을 보니 덩달아 나도 신이 났습니다. 아무리 신이 난대도 그 일을 함께 할 수는 없는 처지였지만 말입니다. 제가 느낀 그때의 즐거움은 아마도 ‘익숙함’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평소처럼 걷고, 평소처럼 말하고, 평소처럼 웃고, 평소처럼 지치는 그런 익숙함. 저는 그 익숙함에 퍽 안정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익숙함의 다음 단계는 기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사’와 ‘낯섦’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아직 빛도 공기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에게는 와 닿지 않는 감각이겠지만 말입니다.
병원을 나서는 날 아침은 이미 온도가 많이 내려갔습니다. 분명 가을에 아이와 만나러 이곳에 들어왔는데 나갈 때는 겨울이 된 것만 같았습니다.
병원을 나서는 아이에게 전해진 첫 선물은 겉싸개였습니다. 아이만큼이나 작고 여린 질감을 가진 이불속에 이현은 폭 감싸 들어갔습니다. 행여나 찬 바람을 맞을까 두려워 일전에 짠 계획대로 아이를 차에 태웠습니다. 온갖 약품과 간호사 전문적 지식이 있는 의사들이 득시글 거리는 병원을 나선다는 것에 두려움이 없지는 않았죠. 하지만 아이에겐 겉싸개가 있었습니다. 이것만으로 충분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직 겉싸개를 제대로 싸는 방법도 익히지 못했고, 도로 위 운전자들은 여전히 난폭했고, 아이는 곧 배가 고플 예정이었으니까요.
어딘가를 헤매는 이유. 그것은 정보의 부족 혹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이 동반돼 찾아옵니다. “내가 왜 그 길을 알아야 해?” “거기가 왜 내 집이야?” “우린 왜 또 이사 가는 거야?” 이런 의문이 쌓일수록 길은 점점 더 복잡해지는 것이죠. 다행히 이번 이사는 달랐습니다. 우리는 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 마음 곁에 물음표가 놓일 자리는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