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
❝ 당신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소설가 케루악의 포즈를 한 채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 하나 제치며 나아간다. 내딛는 걸음걸음이 축제다. ❞
⟪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
글 | 필리프 들레름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하루를 완전히 즐겁게 보낸다는 것.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것은 태어나 몇 년이 지나지 않은 어린 시기였다. 다소 울 일은 많았지만 몇몇 사소한 괴로움(예를 들면 먹고 싶은 과자를 못 먹게 한다거나, 더 늦게 자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게 불을 꺼버린다거나.)은 말을 배우기 전부터 있었고, 놀이공원에 가거나 하루 종일 만화영화를 볼 수 있던 특별한 날에도 하루가 완전히 즐겁진 않았다. 그런 완벽한 날에는 배가 슬슬 아프다거나 남매, 형제, 자매와 같은 이들이 쓸데없는 시비를 걸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어린 하루의 날. 그날의 행복과 불행의 비율을 생각해 보면 적어도 8:2 정도는 되었다.
이 비율은 나이가 들수록 비례의 법칙(그런 게 있나…?)에 의해 자연히 줄어든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비례의 법칙보다는 '자연 소멸'정도의 말이 더 어울렸을까 싶기도 하다) 초등학생 때는 7:3 고등학생 때는 6:4 스무살에는 5:5 그리고 진짜 성인이 되면 행복과 불행의 비율은 역전되고 만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D의 개인적 비율이 그랬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비율을 다시 역전 시키기는 꽤 어렵다는 것인데, 그 원인 중 하나는 기준이 지나치게 높아졌다는 것이다. D는 이쯤에서 어린 시절을 돌아본다. 그때 D에게 가장 즐거움을 주던 존재는 2,000원도 하지 않았던 손오공 캐릭터 장난감이었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손과 발 머리가 돌아가는 형태의 작은 장난감이었는데 그걸 손에 쥐고 있을 때, D는 행복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저 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충만해졌다. 반대로 그것을 손에 쥐고 있지 않았을 때 D는 불안을 동반한 불행의 감정에 휩쓸렸다.
바꿔 말하면 어린 D에게 행복을 주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그 장난감을 손에 쥐어 주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꽤 많다. 다른 장난감도 그랬고, 일요일 아침마다 하는 디즈니 만화가 그랬다. 하지만 문제는 나이다. D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그 정도 장난감으로 행복해지지 않았다. 아니, 더 좋은 장난감. 더 비싼 장난감을 쥐어도 행복은 아주 짧고 허망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때부터는 일부러라도 자신에게 행복을 주는 것을 찾으려 애를 썼다. 온라인 게임이라든지, 친구들과 하는 농구라든지, NBA 카드를 모은다든지, MP3플레이어와 CD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는다든지... 그런 것 말이다.
소위 말해 취미라 불리는 그런 것들은 어린 시절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D에게 행복을 주었다. 지속 시간도 꽤 길었으며, 그것을 하지 못하는 불행한 시간에도 그것을 할 생각을 하면 위안이 되었다.
그러다 D는 성인이 되고, 모든 학교에서 졸업하고 일을 하고 공과금을 냈다. 그렇게 불행의 일들에 자신의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남는 시간은 쥐꼬리라는 상투적 표현에 어울릴 만한 것뿐이었고, 행복에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깨달음 때문이었을까. D는 비가 잔뜩 오는 날 커튼을 연 것처럼 먹구름이 잔뜩 끼었음을, 그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조금 울적해졌다.
D는 i를 본다. "밥, 물, 엄마." 이 세 가지 충족되기만 한다면 행복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i를 본다. 그리고 쓸데없이. 혹은 제멋대로 i의 이어질 날들을 상상한다. i는 아마도 행복할 것이다. 물론 비율은 D가 그랬던 것처럼. J 역시 그랬던 것처럼 조금씩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i도 자신처럼 언젠간 울적함을 느낄 것이다. 만약 그런 날이 왔을 때. i가 이렇게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요즘은 웃을 일이 별로 없어."
D는 생각한다.
"그럼 취미를 좀 가져보면 어떨까?"
i가 말한다.
"그럴 시간이나 있나 뭐. 아빠야 은퇴했으니 시간 많을테고."
D는 발끈하려다 멈춘다. 그리고 책장을 뒤져 필리프 들레름의 산문 ⟪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을 꺼내 든다. 이 책의 시작은 말 그대로 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의 풍경이 그려진다. 잘은 모르지만, 저자가 크루아상의 권위자이거나 마니아는 아닌 것 같다. 프랑스인이니 크루아상을 좋아하긴 하겠지만…. (물론 편견이다. 이 말은 잊어버리렴. i야) 아무튼 저자의 집 근처에는 맛있는 빵집이 있다. 저자의 아침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그 빵집에서는 매일 신선한 크루아상을 굽는다. 저자는 크루아상이 목적이라기보다는 크루아상도 목적인 아침의 산책을 나서는데, 그때 그의 심정을 이런 미문으로 표현한다.
❝ 당신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소설가 케루악의 포즈를 한 채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제치며 나아간다. 내딛는 걸음걸음이 축제다. ❞
맛있는 크루아상을 사러 가는 아침. 그 아침의 걸음걸음이 축제라는 말은 당사자가 아님에도 행복에 겨운 감정을 전달받게 한다. 정말이지 그는 행복해 보인다.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다. 크루아상을 사는 아침이래 봤자 몇 분이나 되겠는가. 그걸 24시간의 비율로 따지면 너무 적지 않은가. i 역시 그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저자의 하루를.
그는 아침에 눈을 뜬다. 성인이라면 모두가 괴로워하는 그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행복하다. 아침은 맛있는 크루아상을 사러 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행복한 마음으로 산책을 나선 그. 그 길 역시 지루할 틈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맛있는 크루아상을 사러 가는 길이니까. 그리고 크루아상을 산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는 내내 행복할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집에 돌아가면 그 맛있는 크루아상을 한 입 크게 베어 물 수 있는데 말이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마찬가지다. 크루아상을 먹기 위해 접시를 꺼내는 순간, 식탁에 앉는 순간, 그것을 먹는 순간까지. 그는 축제를 즐길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인데...
"그렇게 크루아상을 먹어버리면 행복은 끝나잖아요?"
만약 i가 그렇게 묻는다면 뭐라 답해야 좋을까. D는 아주 오래 생각한다. 하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다행인 것은 D는 성인이 되고 J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J가 D와 i의 사이에 앉으며 말한다.
"내일 먹을 크루아상을 생각하면 되지."
맞다. 그러면 된다. 우리의 하루가 매일 다시 주어지듯, 축제는 매일 다시 시작된다. 한 개의 크루아상. 그것이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