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오.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글 | 레이먼드 카버
펴낸곳 | 문학동네
D는 어떤 뇌과학책을 둘러보다가 인간의 망각에 대한 부분을 읽었다. 평소 건망증이 심하고, 대명사를 자주 까먹는 D는 항상 자신의 뇌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앞서 어떤 뇌과학책이라 말한 것도 제목과 저자를 까먹었기 때문이다. 물론 D는 계획적인 인간이 아니었기에 걱정 또한 계획적으로 철저히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부분 낙천적일 수 있었다.
책에서 그가 본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뇌는 우리를 보호해 주기 위해 나쁜 기억은 자연스레 잊어버린다는 것.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D는 환호했다. 자신의 건망증이 실은 자신을 보호해 주기 위한 호위무사 '뇌'의 보살핌이었다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알아두면 쓸모 있는 신비한 잡학마저 까먹는 것은 딱히 좋은 게 아닌 것 같지만서도) 사실 D는 어릴 때부터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넌 쓸데없는 것까지 기억하더라?"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는데, 더 정확한 문장이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수정해야 한다.
"넌 쓸데없는 것만 기억하더라?"
이게 정확하다. D는 정말이지 쓸데없는 것만 기억했다. 예를 들어 오늘 아플 때를 대비해 어제저녁에 뭘 먹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면서, 여섯 살 무렵의 여름. 별다른 것 없는 어느 날의 저녁 메뉴는 기억하는 식이었다. 앞선 본 책의 말에 비춰보면 D에게 있어 최근의 일들은 D를 힘들게 하는 기억이라고, 지극히 문과적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물론 어제 저녁 식사가 아무리 별로였던들... 그것이 D의 몸을 손상케 할 만큼 스트레스를 주는 기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일부 수긍 가는 부분도 있다. 그건 어른이 되어서 D가 알게 된 사실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 그것은 기억을 쌓는 일이다. 우리 몸은 7살까지 필요한 모든 기관이 제 기능을 할 정도로 성장한다. 그리고 성장기에 몸이 커지고, 사춘기에는 이차성징을 겪는다. 그 모든 것을 겪은 후, 우리 몸은 소멸한다. 물론 아주 조금씩. 또 천천히 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 자신에게 있어 쌓인다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은 피로와 기억이 전부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가 어른이 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것 역시 기억이다. (어떻게 생각해도 주름보다는 이쪽이 낫다) 문제는 어른이 될수록, 어른에 가까운 기억일수록 좋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몇몇은 아니겠지만 대부분 어른의 삶이라는 것이 드라마<나의 아저씨>에서처럼 고달프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어제의 기억보다는 훨씬 먼 과거의 기억. 유년 혹은 청춘이라 불리는 시절의 기억을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려 애쓴다. 그렇게 추억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다 보니 어제 들여온 기억의 액자는 놓을 곳이 없다. 그래서 곧잘 잊어버리곤 한다.
D는 이런 생각을 하며 곁을 보았다. 그곳에는 i가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D는 그 모습을 스마트폰 카메라로 담는다. 별다른 보정이 없어도 충분히 예쁘다 생각한다. 그리고 J에게 그 모습을 보낸다. 서프라이즈 선물처럼. 생색을 내면서 말이다. 그러고는 스마트폰을 끄고, 다시 i를 바라본다. i는 지금 성장 중이다. 심장, 간, 폐, 뇌... 모든 기관이 성장 중이다. 그렇게 i는 일곱 해 동안 무럭무럭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청년이 되고 청춘이 되고, 또 어른이 될 것이다. 그러면 어른이 된 i는 지금의 D처럼 어제 일을 잘 까먹고, 과거의 기억을 자주 끄집어낼 것이다. 힘겨운 어제의 기억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하지만 D는 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좋지 않은 경험, 좋지 않은 기억, 좋지 않은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그런 일은 예고 없이 찾아와 대비가 불가하며 이미 쓰여 있기라도 한 것처럼 발버둥 쳐도 피할 수가 없다. (맞다. D는 운명론자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힘겨운 기억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D는 레이먼드 카버의 책을 꺼낸다.
시와 단편으로 작가 활동을 했던 레이먼드 카버. 그의 단편 중에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에는 아이의 생일을 앞두고 불의의 사고로 자식을 잃는 부부가 등장한다. 부부는 생일을 맞은 아이를 위해 근처 빵집에 케이크를 주문해 놓은 상태다. 문제는 생일이 되기 전, 아이가 세상을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그런 상실의 기억을 안고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온다. 당연히 아이가 없는 집이다. 그 집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신경질적으로. 여자가 전화를 받는다. 알고 보니 케이크를 주문한 빵집 주인이었다. 그는 몹시 화난 듯한 말투로 케이크를 찾아가지 않으면 어떡하냐고 따진다. 여자는 어이가 없다.
"우린 이제 막 아이를 잃고 왔는데. 당신은 고작 케이크 따위를 이야기하고 있다니?"
어이없음의 감정은 분노로 바뀐다. 두 사람은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빵집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빵집 주인이 내일 장사를 위해 빵을 굽고 있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는 두 사람. 그들은 빵집 주인에게 자신들이 겪은 일을 쏟아낸다. 그 분노와 아픔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빵집 주인은 터벅터벅 조리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접시에 따뜻한 롤빵을 담아 온다. 아이를 잃은 두 사람에게 그 빵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그때, 빵집 주인이 말한다.
❝ 내가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
D는 이 미문을 담는다. 이것은 훗날 어른이 된 i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잊히지 않는 나쁜 기억. 추억이라 말하기도 벅찬. 그런 힘겨운 일들. D는 i가 그런 일을 겪었을 때, 이 미문을 꺼내보길 바랐다. 잊히지 않는 추억은 덮어쓰는 수밖에 없다고. 그때 가장 효과적인 것은 빵집 주인이 건넨 것 따뜻한 롤빵. i의 눈, 코, 입. 그리고 몸속을 데워줄 그런 음식이라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물론 그보다 먼저. 가능하면 i에게 롤빵이 필요한 일이 없길 바랐다. 그 별것 아닌 기도가 언젠가 도움이 될 수 있길 함께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