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
⟪자기 앞의 생⟫
미문 | 에밀 아자르
1.
J는 솔직하다. 쌓아두는 것을 싫어하며 마음의 서랍이 잔뜩 헝클어진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마음에 잡다한 것이 쌓이기 전, 그것을 솔직히 말하는 편이다. 반면, D는 대부분 솔직한 편이다. 대부분이라는 말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D는 대부분의 일에는 솔직하게 말한다. 특히 누군가 질문을 해온다면 성심성의껏 솔직하게 말한다. 하지만 누가 먼저 묻기 전에는 결코 먼저 솔직해지지 않는다. 또, 특정 부분에 대해서는 누가 먼저 묻는다 해도 입을 열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D를 보며 의뭉스럽다고 말했고, J는 D를 보며 '답답이'라고 말했다.
2.
답답이는 거짓말을 잘하는 편이었다. 텍스트 깎는 노인이라는 별명이 있어서였을까? 답답이는 그럴싸한 거짓말을 꾸미는 것에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이 능력은 답답이가 학생이던 시절, 주변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외박을 하고 싶은 친구에게 그럴싸한 가정통신문을 만드는 것쯤 D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D가 그 능력을 스스로 사용할 때도 있었다. 주로 회피하고 싶을 때였다. 누군가 D의 진심을 물어볼 때, D의 개인적인 일들을 궁금해할 때, D가 모르는 걸 물어왔는데 아는 척해야 넘어갈 수 있다 판단될 때, D는 거짓말을 했다.
그때는 그것이 편했다.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진심을 꺼내 보이는 것보다 편했다. 그래서 거짓말이 거듭됐다. 그러다 보니 D는 지쳐갔다. 숨기는 것에, 드러내지 못하는 것에, 감춰야 하는 것에.
지쳐갔다.
3.
그렇게 지칠 때쯤 D는 J를 만났다. D는 생각했다. J에게는 솔직해져도 괜찮을 것 같다고. 그런 느낌을 받은 이유는 한 가지였다. D는 J의 눈을 바라볼 수 있었다. 누군가 D에게 "왜 J에게만 솔직해질 수 있다고 느꼈어?"라고 묻는다면 D는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J의 관대함이 페르시아의 왕보다 넓었다느니 하는, 이상한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이것이었다. D는 J의 눈을 바라볼 수 있었다.
누군가의 눈을 바라본다는 것. D는 그것이 어려웠다. 심지어 가족들의 눈도 쉽게 보지 못했다. 그것이 거짓말을 잘하는 이들의 벌이라도 되는 것처럼. D는 상대의 눈을 바라보는 것을 어려워했다. 다행히 안경을 쓴 이후부터는 조금 나아졌지만, 그저 조금 나아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J에게만은 예외였다. J를 처음 만난 날. 너무 많은 사람과 함께 만난 자리였지만 D는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되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오래 알고 지낸 이들의 눈도 잘 바라보지 못하는 D가, 처음 만난 J의 눈은 바라볼 수 있다니... D는 안경을 닦는 척, 안경을 벗고 다시 한번 바라봤다. 가능했다. 아마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J에게는 솔직해져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것은. 물론 당시에 완벽히 깨달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후 D가 J를 만나 카페나 술집에 가고, 식탁과 소파에 앉고 같은 침대에 마주 보며 누웠을 때. D는 J의 눈을 마주 볼 수 있었고, 어느 순간에도 솔직해질 수 있었다. J에게만은 그랬다. J 역시 D에게는 조금 더 솔직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건 아마도 D의 귀가 생각보다 컸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으며, 그것은 i가 두 사람 사이에 누웠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4.
i가 태어난 뒤, J와 D의 삶에서 가장 많이 변한 것은 거짓말이었다. 두 사람은, D는 물론이고 심지어 J까지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이 약 하나도 안 써. 심지어 맛있네?"
"여기 무서운 곳 아니야. 그냥 의사 선생님께 인사만 하고 갈 거야."
"아빠, 일 빨리하고 금방 올게."
"엄마, 졸린 거 아니야. 진짜 아니야."
그것 말고도 거짓말을 해야 하는 일들은 점점 늘어났다. 대부분은 착한 거짓말이라 불리는 그런 거짓말들. 또 가끔은 진심이 담긴 것들. 그래서 i가 잠든 후, 눈물이 났던 것들. 그런 것들이 늘었다.
언제였던가. 그런 날이었을 것이다. D와 J의 사이. 아이가 쌔근 잠들었던 날. 두 사람은 i가 더 컸을 때, 그래서 두 사람의 눈을 보고 이런저런 질문을 했을 때. 그 질문의 답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에밀 아자르의 책 <자기 앞의 생>에 나오는 이런 장면처럼.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소설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은 모모다. 그가 사는 곳은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이 모여 사는 일종의 보육원 같은 곳이다. 그렇다고 정식 보육원이라 말할 수는 없고, 로자 아줌마(거의 할머니에게 가까운)가 아이들의 부모로부터 보육료를 받고 아이를 맡아 기르는 곳이다. 모모를 비롯한 그곳의 아이들은 모두 각자의 사정으로 그곳에 모인다. 시설이 좋을 리 만무하다. 어디를 가나 불행이 넘쳤고, 남루하지 않은 장소를 1평이라도 찾아내기 어렵다. 그런 곳에 궁둥이를 붙이고 살아야 하는 이들의 형편 또한 그렇다. 모모는 그곳에서 산다.
다른 또래들보다 덩치가 컸던 모모. 그래서였을까? 그는 또래보다 생각이 많았고, 질문이 많았다. 질문의 대부분은 건물 지하에 사는 지혜로운 노인 하밀에게 향했다. 하밀은 언제나 성실히 어린 모모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사실 대부분은 시시한 것이었다. 하밀만큼 세상을 산 사람에게는 말이다. 그럼에도 하밀은 성실하게 대답했다. 또, 거짓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질문 앞에서는 그토록 오래 산 하밀조차 대답을 망설였는데 그게 바로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라는 질문이었다.
"당신은?"
J가 묻는다.
"나라면 아니라고 말했을 것 같은데."
D가 J의 눈을 보며 말한다.
"당신은?"
되묻는다.
"글쎄. 당신이 대답하면 난 할 필요 없잖아?"
빠져나간다.
"그럼 지금 내가 물어보면?"
D가 모모처럼 묻는다.
"그렇단다."
J는 <자기 앞의 생>에 담긴 답을 대신했다. 책에서 하밀은 그렇게 답했다.
❝그렇단다.❞
이 대답을 하며 하밀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다. 세상을 너무 오래 산 나머지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던 노인의 부끄러움이었다. 세상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모모는 그 자리에서 덩치에 맞지 않게 응앙, 울음을 터뜨린다.
"i도 그렇게 울면 어떡해?"
D는 거짓말을 하지 못해, 그렇게라도 얼룩진 세상을 가려주지 못해, 그 얼룩이 괴물처럼 보여 우는 i를 상상했다.
"이렇게 말하면 되지."
언제나 현명한 J의 말.
"거짓말이야~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어. 내가 너 없이 어떻게 살겠니?"
언제부터였을까. J는 거짓말을 할 줄 알았고, D는 솔직해졌다.
기적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