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두꺼운 일력 한 권을 샀습니다.
한 장, 또 한 장. 때로는 찢는 것을 잊어 며칠이고 과거에 살던 날도 있었습니다.
그런 날이 될 때면 그 숫자에 그 하루에 그 시간에. 얼룩처럼 남은 미련이 떠올라 쓴 미소를 짓고, 따뜻한 유자차를 한 모금 마셨습니다. 그러고는 지각생의 표정으로 일력을 마저 찢어버리곤 했습니다.
올해 초, 두꺼운 일력 한 권을 샀습니다.
한 장, 또 한 장. 이렇게나 많은 하루를 선물 받은 것 같아 기쁜 마음에 올해도 다소 낭비하고 말았습니다. 봄은 벚꽃에, 여름은 파도에, 가을은 낙엽에, 겨울은 눈사람에 하루를 인심 쓰듯 써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회식 후 얇아진 지갑처럼, 일력은 어느새 얇게 쪼그라들었습니다.
남은 날은 이제 겨우 며칠. 그 생각을 하니 쓴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달콤한 모과차를 한 모금 마셨습니다.
이제 정말 허리띠를 졸라매야겠습니다. 알뜰살뜰. 남은 일력을 빼곡히 채워야겠습니다. 지난 시간. 못 만난 이들에게 한 장, 잘 챙기지 못한 내 몸에 한 장, 알지 못하는 이에게도 기꺼이 한 장. 그런 나의 조급한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당신께도 한 장. 일력을 쓰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다 보면 일력의 숫자는 31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이제 실수로라도 두 장을 찢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겠죠. 그 정도의 다행을 위안 삼아 올해의 마지막 춤을 춰봐도 좋을 것입니다. 음악은 뭐로 할까요.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가장 흥겨운 음악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리의 곁에 사랑하는 이의 진동이 함께라면. 올해의 마지막 블루스를 그렇게 출 수 있다면. 무얼 더 바랄 수 있을까요. 무얼 더 감사할 수 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춤이나 추렵니다.
이천이십삽 년 십이 월 오 일
⟪윤고은의 EBS 북카페⟫ '일간 카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