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화가들은 갈대나 나뭇잎, 그리고 어느 여인의 옷자락을 그렸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이름도 없다 생각한 바람. 하지만 지금도 우리 곁을 스치는 바람에는 각자의 이름이 있습니다.
소슬바람.
이것은 가을에 부는 바람의 이름입니다. 처서가 지나고 본격적인 가을에 들어설 때, 그럴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소소하고 슬슬한 바람. 그 바람을 두고 옛사람들은 소슬바람이라 불렀습니다.
소슬바람은 가을바람과는 또 다르다고 하죠. 가을바람이 가을에 부는 선선하고 서늘한 바람이라면 소슬바람에는 조금 더 낮은 온도와 쓸쓸한 감성이 담겨 있는 바람이라고 합니다.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다면 경허 선사의 시 한 편을 만나봐도 좋겠죠.
노을 물든 텅 빈 절
무릎 안고 졸다
소슬한 가을바람 놀라 깨어 보니
서리 맞은 단풍잎만 뜰에 차누나.
이 시에 담긴 바람처럼 소슬바람은 아직 외투를 다 꺼내지 못한 우리에게 다음 계절을 알리고, 겨울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곤 합니다. 그 길은 몹시도 아름답게 붉은 단풍이 수를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건너기에 부담되지 않고, 그래서 건너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는 어쩌면 소슬바람의 안내를 받아 이 계절의 길을 걷고, 저 계절의 입구로 향하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다행인 것은 그 길을 혼자가 아닌, 우리가 같이 걷고 있다는 것이겠죠.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부터의 동행.
아직은 그 길이, 그 바람이 끝나지 않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