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곡식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은 곡식이 아니니 병이다. 정신병. 이 사람은 병원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고 드디어 퇴원하게 되었다. 그런데 병원 문을 나서다 마당에 있는 닭들을 본 이 사람은 허둥지둥 달려와서 물었다.
"저야 물론 제가 곡식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저 닭들도 그걸 알까요?"
아니요. 몰라요. 당신을 먹으러 올 거예요. 당신은 곡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닭들이 알 때까지 내가 보호해줄게요. 자, 안전한 병실로 가시죠.
데일 카네기(1888~1955)는 말했다. 앉은뱅이 사람이 평생 구걸(求乞:구할 구, 빌다 걸/빌어서 구하다)로 살다가 걷게 된다면 그는 좋아할까? 구걸할 수 있는 합당한 구실이 없어진 이 사람은 다시 앉은뱅이로 돌아가고 싶을 수도 있다. 아니,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서 이와 비슷한 증상이 우울증이라고 했다. 우울증은 다른 사람에게 심리적으로 의존(依存:기대다 의, 있을 존/기대어 있음)해서 사는 구실을 주기 때문이란다.
우울증을 스스로 이겨내고자 애쓰던 까마득한 젊은 날 온갖 심리 서적들을 읽으며 발버둥 치던 나는 카네기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징징거리는 내가 한심했고 어떻게든 바로 서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고쳤나? 아니. 근본적으로는 고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살아있고 살아갈 작정이다. 의존하면서, 또 의존되면서. 사람이니까. 人. 이 한자처럼.
어는 시점에선가 나는 카네기를 그저 시대에 편승해 성공한 처세술가 정도로 치부해버렸기에 그 사람이 쓴 책들을 다시 읽지 않았다. 하여 한때 카네기가 쓴 책들을 꽤나 읽으며 힘을 얻은 내가 지금 기억하는 건 '앉은뱅이에 비유한 우울증 원리'뿐이다. 이 마저도 정확하지 않으며 '자기를 곡식이라고 믿는 사람' 이야기 덕에 생각이 났다.
카네기는 우울증이 어떤 병인지 모르면서 아는 척했고 나는 한때 속았고 속았기에 버틸 수 있었다. 선무당이 사람을 살린 경우이다.
자기를 곡식이라 믿는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다.
'나도 사실은 곡식이에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면 나도 갇혀 살아야 하거든요. 저 닭들이 나를 사람으로 보게 만들기까지 나도 꽤 힘들었답니다. 내 방법을 알려줄게요. 하지만 내 방법은 당신한테 맞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찾아봅시다. 내가 당신 곁에 있는 동안 당신이 당신 방법을 찾기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