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히메현 마쓰야마 성
밤 10면 잠이 쏟아지고 6시면 눈이 떠진다. 어제 도고 온천에서 시간을 보내 노곤한 몸이지만 직장인의 생활 습관은 여행지에서도 쉬이 바뀔 리 없다. 어김없이 눈을 뜨고 서둘러 채비를 하여 나왔다.
마쓰야마는 작은 소도시로 이곳의 번화가는 오가이도(大街道)라고 하는 곳인데 일본의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도 이 거리를 걸었다 하니 이 오가이도는 예나지금이나 변함없는 번화가인 것 같다.
아무래도 소도시의 번화가다 보니 모든 유흥 시설이 오가이도에 밀집되어 있는 모습이다. 밤이면 술에 취해 비틀 거리는 이나, 호객 꾼들이 앞다투어 목소리를 높여 손님을 찾는다. 한편 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낮은 고요하기 그지없다. 어느새 깨끗해진 거리 출근 하는 듯 잰걸음으로 속도를 내는 모습들. 여행자의 여유가 돋보이는 순간이다.
오가이도의 숙소에서 걷기를 약 20분, 이 정도면 마쓰야마 성으로 갈 수 있다. 마쓰야마 성으로는 로프웨이나 리프트를 타고 오를 수 있는데 이 비용이 한국인이라면 무료로 탑승할 수 있다. 리프트 같은 경우 아래에 안전망이 있기는 하지만 리프트 자체에 안전장치가 없어 나름대로 짜릿함이 있다. -겁쟁이 한정- 리프트를 타고 시원한 경치를 바라보며 5분 정도 올랐을까.
일본의 성은 해당 지역의 번주가 정치적, 군사적으로 통치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항상 목 좋은 곳에 위치한다. 번주는 중앙 정부에게서 *고쿠다카(石高)를 평가받아 지역 정치와 통치를 실행하며 해당 지표로 번주의 격이 결정된다. 한 가지 예시로 에도 시대 최고 등급의 고쿠다카로 평가받았다는 이시카와현의 가나자와현의 당시 번주는 105만 석의 고쿠다카(石高)로 평가받은 만큼 풍족한 재정을 자랑했으며 당대 최고의 정원과 훌륭한 성이 있었다. (성은 낙뢰와 화재, 지진 등으로 소실되었다.) 그 정원은 현재까지도 일본 3대 정원으로 여겨진다.
한편 마쓰야마의 창시자는 마쓰다이라 사다유키(松平定行)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복동생인 마쓰다이라 사다카쓰(松平定勝)의 둘째 아들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가까운 관계였으며 후에 고쿠다카 15만 석으로 상향 평가받아 초대 번주로서 임명되었다.
시코쿠 자체는 일본 역사의 한편에서 묵묵히 시간을 보내왔다. 근현대에 이르러 격정적인 순간에 반짝 떠 올랐을 뿐 그때의 영광을 간직한 채 이곳에 성이 우뚝 서 있다.
그러나 마츠야마 성은 일본에서 천수각이 보존된 단 12개의 성 중에 한 곳이기에 역사적인 의미가 깊다. 경내로 오르기 시작하면 군사 시설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높이가 불규칙한 계단이 살짝 신경을 건드리고 성 중앙으로 가려고 하니 이곳저곳 갈랫길에서 인생의 고민을 하게 하거나 고개를 올려 보니 총포를 쏘는 곳, 돌을 떨어뜨리는 곳, 깨기 어려운 무거운 철 문 등이 충실히 남아있다.
경내에는 수령이 오래된 듯한 벚꽃나무가 봄을 기대하게 했고 오늘따라 파아란 하늘이 검은 성과 대조를 이뤄 하늘이 더 푸르렀다. 마츠야마 성내에서는 500엔짜리 수도꼭지 감귤주스를 커다란 맥주잔에 판매하는데 어제의 좋은 기억으로 주문해서 한잔 마셨다. 문득 품종이 뭘까 해서 물어보니 ‘비공개’ 란다. 아마도 종업원 분께서도 모르시거나 그냥 일반 감귤 주스 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냥 마셔라고 생각하며 시원하게 주스 한잔을 들이켰다.
*고쿠다카(石高): 주로 쌀의 생산량을 기준으로 토지의 가치를 나타낸 지표. 해당 지역 번주의 영지 규모나 경제력 정치력을 측정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에도시대에는 대략 210개의 번이 있었고 에도 시대 10만 석 정도의 고쿠다카는 60여 개 번이 있었다. 마쓰야마도 15만 석의 고쿠다카로 중상 정도의 규모의 번으로 정치적으로 입지가 높았다. 참고로 가장 높은 고쿠다카였던 100만 석 이상의 번은 단 하나 당시 가카번(加賀藩)이었던 현재의 이시카와현이며 중심지는 가나자와(金沢)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