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없어요

길 없는 곳에 길을 만드는 초록노동자

by 초록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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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들어가며 식물 조사를 한 지 이십 년이 되었어요. 오늘도 길이 없는 곳을 헤치며 식물 지도를 만들고, 조사지역에 살고 있는 식물의 목록을 작성했어요. 제가 하고 있는 일은 전국자연환경조사입니다. 전국을 대상으로 5년 주기로 동식물을 조사하는 사업이에요. 다른 부서의 업무지만, 야외에 나가 식물을 관찰하고 싶어서 참여하고 있어요.


길가 옆에는 인간의 간섭을 많이 받는 식물들이 자라요. 숲 속의 식물들을 관찰하려면 길이 없는 곳을 통과해야 합니다. 길가에서 숲 속으로 가는 길 없는 길은 험난합니다. 그런 곳을 숲 가장자리라고 하는데요. 햇빛이 온전히 쏟아져 내리는 그곳을 차지하려는 식물들의 경쟁이 치열해요. 빽빽이 들어찬 식물들 사이에 가시가 있는 식물들이 섞여 있어요. 줄딸기, 수리딸기, 환삼덩굴, 찔레나무... 못 보고 그냥 지나치다가는 살이 긁히고 바지가 찢겨요.


무성한 식물들 사이에 뱀이 있지는 않을까, 벌집을 건드리지 않을까, 움푹 파인 곳이 아닐까, 걱정을 하며 조심스럽게 발길을 내딛습니다. 평소에는 등산스틱을 가지고 다니며 길을 만들고 뱀이나 벌집을 확인하며 걷는데, 오늘은 가지고 오지 않아서 조마조마했어요. 환삼덩굴과 쇠뜨기로 가득한 풀숲에 폭 파묻혀 있던 큰 돌을 잘못 디뎌 살짝 발목을 삐끗했지만, 이 정도면 오늘은 무사히 조사를 마친 것입니다.


길 없는 곳에 발을 디디다가, 내 삶도 이렇게 길 없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장 내일도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채로 오늘을 살아가요. 이미 나 있는 길을 걸을 때는 편하지만, 이렇게 길이 없는 곳을 걸을 때는 힘들지요. 삶은 대체로 길이 없기에 편한 날보다는 힘든 날이 많은가 봅니다. 최근에 읽은 <살면서 쉬웠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라는 책이 떠오릅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을 내어 숲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온전히 보전된 숲 속에 가면 평소에 볼 수 없었던 귀한 식물들을 만날 수 있어요. 안정된 숲 안에서 조용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식물들을 만나요. 그 짧은 순간을 위해 길 없는 길을 걷고 온갖 위험을 감수합니다. 그들의 삶을 기록하여 보전하기 위한 증거들을 수집해요. 식물에게 이로운 삶, 그 삶의 길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저는 자연 속에서 길을 만들며 숲을 향해 앞으로 나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