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화과프로세코 May 27. 2020

바닥을 칠 땐, 달려봐

내가 달리기 시작했다니...


2020년 봄부터, 그러니까 3월부터 나는 달리기를 시작했다. 사실, 내가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것이 지금도 가끔 신기하다. 나는 달리는 걸 싫어했다. 무거운 다리, 숨이 차고 터질 듯 한 심장, 찢어지는 듯한 고통의 허벅지를 느끼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두려웠다.

나는 절망적이었고 절박했다. 그렇게 바닥을 쳤을 때 달리기는 내 삶 기적의 시작이 된 것 같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달리니 힘든 마음이 위로되는 것 같았다. (코로나 시대로 덕 보는 것 중 하나이다) 혼자 달리니까 귀에 친구가 필요했다. 처음엔 귀가 찢어지는 듯, 하지만 심장에 펌프질을 해대는 것 같은 운동 동기부여 음악을 들었고, 이별 연애 코칭을 빙자한 자기 계발 영상을 한 달 반을 들었다. 그러다가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달리는 바람에 눈물을 흩날리며 'ㄱㄱㄲ', '나쁜 놈'을 연발했다.


두 달 반이 지난 지금은 문학, 영화, 일상을 다루는 잔잔한 팟캐스트를 들으며 마음 편히 달린다. 달리기 중 듣는 콘텐츠의 변화를 보니 내가 성장하고 슬픔을 극복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다. 달리기는 나에게 힐링이 됐다. 가끔 눈을 감고 몇 발짝을 뛰는데,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 종종 느끼곤 한다. 진짜 자유가 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나의 달리기 트랙은 우리 동네 기차역 뒤편의 논둑길이다. 300m쯤 되는 논길을 달리면 양 옆으로 시원한 동네 개천이 나온다. 처음 달리기 시작한 3월 중순엔 가뭄으로 메말라 있었는데 근 일주일 반 사이에 논에 물이 가득 찼다. 자연으로 둘러 싸인 도심 속 농촌이라 은근한 장면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달리기 트랙이다.


개천의 끝 모퉁이를 돌면 가끔 빈상자를 실은 수레가 보인다. 아저씨가 보이면 나는 힘차게 트럭까지 밀어드린다. 아저씨는 등이 많이 굽었다. 처음부터 자처한 것은 아니었다. 울면서 달리던 어느 날, 아저씨가 나의 도움을 힘껏 요청하셨고 나는 울면서 밀어드렸다. 마음이 바닥을 쳤을 때, 우연히 누군가를 도우면서 자기 위로와 자존감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그 후에 깨달았다. 작은 도움이지만 아저씨의 하루를 수월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은근한 성취감과 나 자신에 대한 감사함이 든다. 남을 도움으로써 나 자신에게 친절해질 수 있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 후로 수레를 보면 아저씨를 먼저 힘껏 불러본다.  



달리는 논둑길에서는 다섯 마리의 개를 만난다. 코너를 돌 때 만나는 두 마리는 주말에 하루만 밖에 나와 얼굴을 볼 수 있는데 살랑살랑 애교를 잘 피우다가도 평일 동안 집에 울타리 안에 갇혀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면 아쉬워서인지 사나워서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짖어댄다. 코너를 돌아 죽 달려가다 보면 거름 냄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구간에서 만나는 두 아이는 열정적으로 나를 향해 짖는다. 나는 기분에 따라 무시하거나, 맞짖어댄다. 둘 다 사나운 개를 진정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요새는 좀 익숙해졌는지 짖는 강도는 낮아지고 짖는 시간도 짧아졌다. 확실하게 배워둔 건, 개가 사납게 짖을 때 쫄면 안된다는 것이다. 태극기를 꽂아둔 한 농장에서는 시바견인지 진도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다정한 개가 가끔은 나와 함께 달리기도 하고 저 멀리서 나를 그저 바라보기도 한다. 5마리 중 유일하게 다정한 아이다.


아담한 닭장을 지난다.  검은 닭, 흙색 닭, 회색 닭 색깔이 다채로운 닭을 여러 마리 키우는 집. 닭들이 안전하게 쉴 수 있는 실내공간이 있고 조그만 개구멍 문을 달아 모래밭 마당으로 나와 놀 수 있도록 설계해둔 닭장이다. 생명의 움직임이 더디던 초봄, 활발하게 살아있는 것이라곤 닭들과 개들 뿐이어서 닭들을 한참 구경했다. 너른 모래 마당에 나와 저마다 파놓은 구들에 들어가 푸다닥 거리며 모래찜질과 목욕을 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닭은 원래 저리 노는구나 생각 들며 잠시 슬퍼지기도 했다. 그중에는 탈모가 심한 아이들도 있었는데 싸움 때문인지 스스로 털을 뽑아내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논에 물이 채워지기 시작하며 여러 철새들이 쉬어간다. 헤론이라는 영어 이름이 더 익숙한 왜가리와 목과 머리가 노란 캐틀 이그렛, 그리고 쌍을 지어 다니는 오리까지. 달리기를 하며 생태 공부가 자연스럽게 된다. 특히 캐틀 이그렛은 이국적인 외모에 더욱 눈길이 갔다. 나의 끈질길 구글링 덕에 이름을 알아냈다. 한국에는 거의 오지 않는 여름 철새였는데 이것도 코로나의 순기능일까? 새로운 생명을 마주한다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오, 백과사전에 찾아보니 한국 이름은 황로이다.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매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살아있음을, 소중한 순간을 일깨워준다.


빨리 달리지도, 오랜 거리를 달리지도 않는다. 달리는 행위 자체에 마음을 둔다. 온전히 나를 위한 셀프케어 행위의 일환이다. 처음보다는 물론 조금은 수월해졌지만 두 달이 지난 지금도 중간쯤 되면 숨이 턱턱 막히고 허벅지에 젖산이 나를 괴롭게 하며 괴로움을 느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늘려가는 것이다.


이렇게 고통스러웠던 달리기를,


하루가 지나면 또다시 시작한다. 중도의 괴로움을 까먹는 것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 맞는 것 같다. 마음이 다쳤을 때는 몸을 돌보라고 이슬아 작가가 그랬다. 그 말을 알고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달리기를 시작하고 나서 삶이 더 괜찮아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뛰자!


매거진의 이전글 내일 조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