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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과 Jun 02. 2022

호텔방에 앉아 당근언니를 생각해요

쿨거래였다. 당근마켓, 폴라로이드 카메라, 미개봉, 반값.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이미 있는데 똑같은 모델을 선물받아 파는 것이라고 했다. 주저 없이 다음날로 거래일을 정했다.


"그... 저기요..." 현금을 건네고 돌아서는데 망설임이 묻은 목소리가 뒷덜미를 잡았다. 아무래도 아쉬운 가격이었나? 현금이 더 없는데. 주춤거리며 돌아선 내게 그녀가 말했다. "오지랖일 수도 있는데요, 당근 거래하실 때 너무 친절한 말투 쓰지 마세요. 젊은 여자인 거 티나요. 집 앞에서 거래할 때도 많잖아요. 근데 세상에 나쁜 사람이 너무 많아서..." 30대 중반쯤 될까. 그녀의 눈에 담긴 걱정과 공포가 단숨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서 나는 멍청하게 "아... 네..." 하고 답했다. 그녀는 내게 먼저 목례를 한 뒤 뒤를 돌아 멀어졌다.


나는 가끔 그녀를 생각한다.  


가장 최근에 '당근언니'를 떠올린 건 부산 여행에서였다. 남편과 호텔방에서 떡볶이를 시켜먹고 배를 두드리고 있는데 복도에서 주정뱅이 특유의 큰 목소리가 반복됐다. 남자 목소리는 비교적 발음이 또렷했다. 그가 되풀이해서 하는 말은 하나였다. "네 방, 몇 호야?" 일행이 맞긴 할까. 나는 오싹한 기분이 들어 문구멍에 눈동자를 들이밀었다. 남자의 어깨에 걸쳐있는 여자가 위태로워보였다. 쏟아진 머리칼에 얼굴도 제대로 안 보였는데 그녀가 어리다는 사실이 본능적으로 전해졌다.


순식간에 나는 당근언니가 되어버렸다. 저 애를 어쩌면 좋지. 뛰쳐나가려는 나를 남편이 말렸다. "어차피 일행인지, 투숙객인지는 호텔밖에 확인 못할 거야." 나는 프론트에 전화를 걸었고 몇분 뒤 방문 밖에서 직원이 예약자라고 주장하는 남자의 이름을 확인하러 로비로 데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지금도 길을 걷다가, 술을 먹다가, 버스를 타고 가다가, 가끔 그때 내가 어떻게 했어야 맞는지 부산의 호텔방으로 돌아가보곤 한다. 당근언니라면 그 애의 손을 잡고 같이 로비로 가줬을까?


삽십대가 되고 보니 누군가의 언니가 되는 일이 늘었다. 이십대에 나의 안전을 염려해주는 건 늘 언니들이었다. 늦게까지 술을 마신 밤에 집에 잘 들어갔는지 묻는 것도, 내가 어떤 단계에 진입하기도 전에 아무 대가 없이 미리 알려주고 경고해주고 나눠준 건 언니들이었다(훌륭한 오빠들도 물론 있었지만 대부분은 어떤 의도가 있었다). 이제 내가 언니를 맡을 차례인데, 이 언니는 모르는 것 투성이다. 그래서 언니는 걱정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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