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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과 Sep 08. 2022

마음이 폐가 같다

"쉴 때는 뭐하세요?"


업무 미팅을 마치고 일어서며 A대표가 내게 물었다. 별 대단한 답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은 아닐 것이다. 무슨 대답이 나오든 "오, 그렇구나. 연휴때 그럼 그렇게 시간 보내시겠구나. 추석 잘 지내시고요." 하고 목례나 했겠지.


그런데 나는 대답을 못했다. "뭐..." 하고 시작된 내 대답은 궁색했다. 대충 얼버무린 뒤 서둘러 짐을 챙겨 자리를 떴다. 얼굴이 붉어졌다. 얼굴이 뭐야. 발가락 끝까지 빨개지는 기분이었다.


'마음이 폐가 같다' 지하철역을 걸어오면서 생각했다. 그런데 겉보기엔 말쑥한 폐가.


직업인으로서의 나는 제법 근사하다. 숱한 언어를 다룬다. 매일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업무지만) 글도 쓰고. 할 건 다 한다. 그런데 내 이야기가 없다. 나는 주로 질문을 하고, 남의 이야기를 받아적는다. 이상적으로는 여기에 내 판단이 촘촘하게 껴들어야겠지만. 아시다시피 밥벌이라는 게 그렇게 아름답지를 못 해서. 나는 매일 적당히, 무난히 업무를 쳐낸다.


치열하게 일하지 못해서 치열하게 쉬지 못한다.


'내가 왜 이렇게 말을 못 하지? 예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생각한 지가 제법 오래다. 이제 알았다. 내게는 내가 부족하다. 나의 고유한 목소리를 정제해 버릇하지 않은 지 오래다. 무언가에 대한 오롯한 나만의 판정을 벼르는 대신에, 누군가에게 묻거나 누군가의 권위에 기대는 식으로 판단을 유보했다. 좋게 말하면 중립적으로. 실상은 비겁하게.


나는 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금방 텅 비어 버린다. 눈빛은 흐물흐물해지고 자세는 흐트러진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순식간에 폐가로 허물어지듯이.


회사에는 폐가가 즐비하다. 제일 좋아하는 음악을 물어보면 20년 전에 즐겨 듣던 가수 이름을 말하고, 최근에 인상 깊게 읽은 책을 물어보면 '요새 한가하냐'고 심통을 돌려주는 어른들. 내가 나를 돌보는 데 인색해서 남을 돌보는 일도 우습게 여기는 어른들.


폐가로 남을 수는 없다. 연휴를 앞두고 이렇게 비장할 일인가? 나는 이번 연휴를 아주 낯설게, 적극적으로, 치열하게 쉬어볼 참이다. 오늘 밤에는 '저런 건 속 시끄러워서 싫어' 하고 미뤄뒀던 다큐멘터리들을 볼 것이다. 마음밭을 뒤집어 놓아야지. 그리고 다시 브런치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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