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헤어질 결심'은 하나도 안 궁금해. 내가 궁금한 건 '결혼할 결심'이야."
친구들과 영화 <헤어질 결심> 감상을 얘기하던 중이었다. S언니가 불쑥 말했다. 답할 만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29살에 결혼한 나는 웬만한 모임에서 유일한 기혼자를 맡고 있다. S언니는 나를 보며 말했다. "헤어질 결심은 우리 다 해봤잖아. 진짜 미지의 영역은 '결혼할 결심'이야."
"어떻게 결혼할 생각을 했어?" "어떤 부분을 보고 결혼할 사람이라고 확신하게 됐어?" 유부 선배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던 내가 이제는 거꾸로 질문을 받는 처지가 됐다. 그때의 그들처럼 '후후, 정말 미혼자만 하는 질문이군' 하는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됐다.
"일단, 종은 울리지 않았어." 나는 이렇게 답한다. 숱한 기혼자들이 내게 답해줬듯, 운명적 상대를 만났다는 계시 같은 건 없었다. 대단한 사건도 없었다. 내게 신장을 떼줬다든가, 빚의 수렁에서 꺼내줬다든가, 전쟁 속에서 함께 살아남았다든가... 그런 거창한 이야기는 없다. 평범하게 연애를 시작했고, 적당히 싸우고 화해하고, 그러다 보니 '결혼하면 어떨까' 싶었다.
영 시시하다면 이런 설명도 보탠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어." 그러면 친구들은 "무슨 청문회냐"는 반응을 보이는데, 청문회보다 중요하지. 장관은 임기라도 있다. 남편은 (웬만하면) 종신직이다. 장관은 아무리 분탕을 치고 일해도 명절에는 (웬만하면) 쉰다. 남편과의 파트너십은 명절에 빛을 발한다.
남편을 만나기 전에 결혼을 말하는 남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더도 덜도 말고, 딱 하나씩 있었다. '이 사람은 다 좋은데 술만 마시면 다른 사람이 되네.' '씀씀이만 비슷했어도...'
물론 남편이라고 해서 완전무결한 사람은 아니다. 게다가 나와는 성격도 많이 정반대. 나는 뭐든 꽂히면 브레이크 고장난 1톤 트럭처럼 질주하는데, 남편은 수세미도 마트 세 곳을 비교해본 뒤 구입한다(이 일화를 들려주면 다들 과장인 줄 알지만 실화다).
하지만 그에게 아쉬운 점이 보여도 납득 가능했다. '그의 성실함이 유유부단함보다 중요하니까.' 이건 내가 그즈음 나의 우선순위를 정립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는 내게 무엇이 중요한지 알았다. 또 그가 자신의 장단점을 솔직하게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면 대체 내겐 무엇이 중요했나. 남편의 결함은 내게 귀여워 보였다. 그렇다. 귀여우면 게임 끝인 것이다.
나는 귀여움에 진지하다. 아이와 달리 어른이 귀여움을 유지하려면 무수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귀여운 어른은 타인에게 폭력적이거나 위협적이지 않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야 한다. 밥벌이가 시시각각 자아를 노리는 와중에도 소소한 꿈을 간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간신히 귀여울 수 있다. 나는 남편의 귀여움을 신뢰하고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이건 애써 찾은 이유들이다. 이렇게 열심히 말해봤자 속시원한 설명이 못 되리라 것을 안다. 실은 나도 결혼할 결심이 여전히 신비하다. 결혼의 세계라는 건 날마다 새롭기 때문에. 그러니 결혼할 결심이란 결혼 생활을 유지할 결심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혼자들은 절대 모르겠지만.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