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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과 Jun 17. 2024

산후조리원 불륜녀가 손에 쥔 물건은

나, 가스라이팅 당한 걸까

아내의 산후조리원에서 첫사랑을 만나 바람을 피운 남편. 뭐라고요? 산후조리원에서 막 돌아와 유튜브를 보는데 '탐정들의 영업비밀'이라는 방송 클립이 떴다. 불륜의 장소가 산후조리원이다. 내가 산후조리 관련 영상을 하도 검색해대 알고리즘에 걸린 모양. 세상 온갖 막장 스토리를 모아 소개하는 그저 그런 예능 프로그램 같았는데, 심지어 자기 새끼 낳아준 여자가 누워있는 산후조리원도 불륜의 무대가 된다니 놀라울 뿐이다.



재연 장면에서 불륜남녀는 암수한쌍 정답다. 익숙한 산후조리복을 입은 불륜녀가 수줍게 웃는데... 어? 저 여자 손에 든 거 저건? 나 저거 아는데?


유축기 깔대기였다. 맙소사. 그렇지. 산후조리원 하면 유축기지. 유축기는 산후조리원 들어가기 전까진 보도 듣도 못한 물건이었다. 출산 후 모유수유를 해야 하는데 아기가 엄마 젖꼭지를 잘 못 물거나 젖양이 아기 먹을 만큼 충분하지 않아 늘려야 할 때 모유를 펌프로 뽑아내주는 기계.


아가들이 신생아실에서 자고 있는 밤, 고요한 산후조리원 복도를 걸으면 각 방에서 펌프 소리만이 취익취익 흘러나왔다. 무슨 공장도 아니고. 그 기괴함이란. 애 낳고 몸도 채 추스리지 못한 여자들이 새벽까지 기계까지 동원해 젖을 뽑아내고 있는 건 오직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기 위해서다. 좋다고들 하니까. 그렇게나 좋다니까.


아기를 낳은 뒤 나는 엄청난 '모유라이팅'을 마주했다. 가슴 모양이 안 좋았음에도 유축해서 완모(완전모유수유)한 엄마, 둘째 아들 모유 못 먹여 한이 된 시어머니, 입소 첫날부터 내 가슴부터 주물러댄 산후조리원장... 모두가 모유, 특히 초유를 먹여야 아기가 건강하다며 아우성이다. 온 세상이 나한테 우유 맡겨놓은 줄 알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임신 전까지 매일 소맥 퍼마시고, 자주 (일하거나 노느라) 밤새고, 요리에 대한 의지가 없어 배달음식을 즐긴 내 몸에서 나온 모유보다 온갖 연구진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는 분유를 먹는 편이 더 건강할 것 같은데. 세상에는 모유가 좋다는 연구 결과만 한가득이다. 그건 배달의민족 없는 세상을 산 옛 산모들 얘기 아닐까 싶지만...  물론 논문을 찾아 확인할 열의는 없다. 열의는 모유를 권하는 쪽에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무려 생후 24개월까지 모유수유를 권장한다.  임신출산대백과 책에는 심지어 흡연을 하더라도 모유수유를 포기하지 말라는 대목까지 있다. 거의 광기다.



분유회사조차 모유를 권하는 사회다. 모유가 부족할까 미리 사놓은 분유통에는 "모유가 아기에게 가장 좋은 식품입니다." 문구가 박혀있다. 문구 앞에는 "중요"라고 표시돼있다. 법적 의무사항이란. 폰트 크기까지 정해져있다(작게 쓰면 안 보일까봐) 분유의 가장 강력한 대체재는 모유일 텐데. 이건 펩시 캔에 "콜라는 역시 코카콜라입니다." 적어놓으라고 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신성한 모유에 이런 경박비유밖에 생각이 안 난다...) 건강상의 이유로, 혹은 여러 조건을 감안한 개인의 선택으로 모유수유 대신 분유수유를 택한 엄마들에게 괜한 죄책감을 짐 지우는 문장처럼 보인다.


출산 전, 나는 초유만 먹이고 단유하겠노라 결심했다. 아이를 낳자마자 열달 동안 참은 아이스아메리카노와 맥주를 물처럼 들이키고 싶었다. 아이를 재운 뒤 살얼음 낀 맥주잔에 병맥주를 따라서... 꺅. 여전히 이런 상상에 내가 꺅꺅거리고 있다는 건 아직 모유수유 중이라는 의미겠지. 심지어 완모(완전모유수유) 중이다.


나, 가스라이팅 당한 걸까? 산후조리원에서 "복 받았다"는 말을 매일 들었다. 가슴 모양도 좋고 아기가 빠는 힘도 좋아 모유수유하기 최적이란다. 단유하면 손해라는 말에 흔들려버린 내 마음. 한 인간의, 그것도 내 새끼의 평생 면역력에 기여한다는데 그까짓 커피, 고작 맥주쯤이야. 심지어 젖양도 날마다 늘어났다.


무엇보다 모유수유를 끊을 수 없는 건 나만 알 수 있는 감각 때문이다. 눈도 못 떴으면서 배고프면 내 가슴에 고개를 마구 부비는 아기(이때 단유 상태면 얼마나 안타까울까), 젖을 대면 크왕! 하고 맹수처럼 물어버리는 작은 입, 오물거리는 통통한 볼... 그런 것들을 하루에 몇번씩 온전히 나만 누릴 수 있다. 피곤한 날엔 남편에게 "내가 열달 품고 낳기까지 했으면 부유(父乳) 정도는 나와줘야 하는 거 아니야?" 구박할 때도 있지만... 근데 인류 진화는 정말 부성애에 너무 박한 감이 있다...


모유수유를 하면서 조금 이기적으로 굴기도 쉽다. 나는야 마법이 풀린 신데렐라. 임산부 시절에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지만 출산 이후엔 내 몸에서 분리돼버린 아기를 챙기느라 내 몸만 챙기기 어렵다. 마냥 드러누워 있고 싶지만 아기를 먹여야 하고 입혀야 하고 씻겨야 한다. 하지만 질 좋은 모유를 위해서는 내 몸이 건강해야 한다. 맛난 거 먹고 잘 자는 게 최우선. (아기 챙기느라 잠 못 자면 젖양이 줄어드는 아이러니) 아무도 나를 구박하지 않건만 나부터 챙기자고 내가 나를 설득하는 게 제일 힘들다. 모유수유부라면 얘기가 다르다. 나는 남편에게 부성애를 발휘할 기회를 적극적으로 주는 편이다. 하하. 모유수유의 대표적 이점, 다이어트는 사실 그만큼 내 몸이 영양분을 뺏기고 있다는 뜻이다.


혀가 길었지만 모유수유를 포기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게으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부지런한 엄마가 못돼서 젖병을 씻고 소독하고 정리하는 게 세상 귀찮다. 신생아는 2~3시간마다 먹는데, 수유에 30분쯤 걸리고 그 사이 기저귀도 갈아줘야 한다. 말 그대로 먹이고 뒤돌아 서면 다시 먹여야 하는 무한궤도 속에 젖병까지 챙길 틈을 내야 하다니. 급하면 웃통 까서 물리는 게 지.


그래도 다음엔 지옥의 젖몸살에 대해 써볼까 한다. 모유수유가 아름답고 순탄하기만 했다면야 내가 브런치에 돌아오는 데 50일 넘게 걸릴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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