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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과 Jul 01. 2024

아가야, 엄마 좀 살려줘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

시작은 구토와 설사였다. '어제 먹은 음식이 뭐가 잘못 됐나?' 아침에 화장실에서 한바탕 하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기 50일 기념 스튜디오 촬영 예약일. 신생아를 데리고 집밖을 나선다는 건, 거기에 더해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을 만큼 나를 꾸며야 한다는 건 여간 번잡한 일이 아니다. 약간의 컨디션 난조는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리고 입덧을 겪은 뒤 나는 웬만한 구토에는 의연해져버렸다...


정신 없이 촬영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라, 이건 좀 심상치 않았다. 열이 오르는지 오한으로 몸이 달달 떨리고 손발이 차가워졌다.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 두통도 심했다. 집에 오자마자 싸매고 누웠는데, 체온계에 처음 보는 숫자가 떴다. 39.1도. 뭐라고? 남편은 심각해졌다. 예전이라면 당장 둘이 병원으로 달려갔겠지만, 갓난아기가 있어 그러지도 못한다. 한밤중에 나 혼자 병원에 가야 하나? 보호자로 누굴 부르지? 그때 가슴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가슴은 돌덩이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아, 이거구나. 말로만 듣던 젖몸살이었다.


"애 낳을 때보다 아팠어. 조심해." 일찍이 선배들이 그렇게 경고했던 젖몸살이었다. 빠져나가지 못한 모유가 가슴에 고여 일종의 염증을 일으키는 것. 모유 양은 늘어나는데 아기가 빠는 힘이 부족한 출산 직후에 주로 찾아온다고 했다. 그럴 경우 산후조리원에서 마사지로 모유를 빼주는데, 오죽 아프면 이 마사지 이름이 '오케타니(통곡이란 뜻이다) 마사지'다... 친한 언니는 젖몸살을 어찌나 혹독하게 앓았던지 그 뒤로는 젖소가 딱해 우유를 다시는 못 마신다고 했다(젖소는 어떻게 계속 우유를 생산할 수 있을까? 인간은 젖소에게서 우유를 얻기 위해 젖소가 가임기 내내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게 만든다). 나의 경우는 아무래도 밤에 지쳐 자느라 남편이 분유를 먹이고 모유수유를 건너뛴 게 화근인 모양이었다.


젖몸살은 그야말로 젖에 오는 몸살이겠거니 했다. 가슴에 통증이 생기는 건 이해하겠는데 온몸이 이토록 아플 건 뭐야. 부랴부랴 검색해보니 고열로 119 불러 응급실에 갔다는 사람, 탈수로 링거를 맞은 사람, 젖몸살이 지독한데 아기가 빠는 힘이 약해 남편이(!) 대신 모유를 비워줬다는 사람의 얘기가 줄줄이 나온다.


경험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특효약은, 아기의 입이다. 모유수유를 하는 것. 모유가 고여 생긴 일이니 모유를 비워주라는 것. 하지만, 당연한 말이지만, 아기가 아무 때나 밥을 먹는 건 아니다. 나는 수유텀을 기다렸다가 아기에게 가슴을 물렸다. 꿀떡꿀떡. 아기가 식사를 시작하자 진통할 때처럼 신음이 나올 정도로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곧 단단하게 뭉쳐 아리가슴이 거짓말처럼 말랑해졌다. 동상이 풀리고 화상이 아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상쾌함이란. 마치 진통 끝에 아기가 나오는 순간 느꼈던, 극강의 시원함 같았다. 내 근심과 피로를 아기가 다 가져가주는 기분이었다. 완벽한 결자해지였다.


억울함.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입덧도 진통도 아니었다. 억울하다는 감정이었다. 둘이 같이 부모가 되는 건데 어쩐지 남편은 꽁으로 아빠가 되는 것 같다는 억울함, 신체적 변화를 혼자 겪어내며 '너는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몰라도 되는구나' 생각하게 되는 억울함, 온몸이 부서져라 아기를 낳았는데 다시 몸이 부서져라 아기를 돌봐야 하는 억울함, 아무리 최선을 다 해도 최선을 다해 울어대는 아기를 볼 때의 억울함.


한 마디로, 나는 희생하는 게 싫었다. 손해보고 호구잡히는 기분이 분했다. 나 혹시... 공정에 민감한 MZ였던 걸까...? 부모가 되는, 세상에서 가장 가성비 떨어지는 일을 하기로 해놓고, 기브앤테이크를 마음 속으로 따지고 앉아 있었다.


그 모든 억울함이 젖몸살과 함께 풀렸다. 아기의 생존을 위해 내가 필요하듯, 지금 이 순간 내게 아기가 필요하다는 감각. 오직 아기만이 나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내 억울함을 씻어내렸다. 어차피 다 출산으로 시작된 문제 아니냐고요? 세상에 결자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기의 오물거리는 뺨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다, 철딱서니 없는 엄마는 뒤늦은 반성을 한다. 아기란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대상일 텐데. 네가 나를 도운 뒤에야 이토록 각별해지다니. 그럼에도 작은 인간이 나를 구해준 이 순간은 두고두고 나를 구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아가야, 네가 나를 살렸어. 고마워. 아기를 남편에게 맡겨두고 외출한 주말, 가득 찬 모유를 화장실에서 짜내 버리면서 또 생각했다. 너와 나는 이렇게나 지독하게 얽힌 몸이구나. 그게 소름돋게 무섭고 또 심장 떨리게 좋았다. 아기를 만나기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감정의 진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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