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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과 May 07. 2024

대뜸 내 가슴을 주물렀다

지금 제가 천국에 있나요

"조리원 천국 어때"


아기를 낳고 산후조리원에서 지낸 지 일주일. 사촌오빠에게 카톡이 왔다. 그는 16개월 아들을 둔 육아선배로, 유아차와 젖병소독기, 분유포트 등등을 내게 물려준 은인이다. 그가 얼마나 육아에 진심인지는 조카가 "엄마"보다 "아빠"를 먼저 익혔다는 사실, 아이가 커갈수록 심해지는 그의 손목터널증후군과 숱한 한의원 진료기록 등이 증명한다.


"여기 천국 맞아? 신입엄마연수원 같은데?"


아무 것도 모르는 햇병아리 상태, 혼나는 게 일상인 신병 신세(입소하자마자 양말 안 신고 맨발로 다녔다가 마주친 3명에게 연달아 혼났다), 쉴 틈 없이 호출 당해 뭔가 교육당하는데 내 정신머리는 그것들을 소화할 준비가 전혀 안 돼있다는 점까지. 나 이거 안다. N년 전 입사 초반의 기분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시작은 호기로웠지. 모든 것은 기세 싸움. 내 흐름을 잃지 않겠노라고,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내 멋대로 하겠노라고, 조직의 흐름에 순종하지만은 않겠다고 그때도 지금도 생각했다.


그런데 조리원에 가자마자 젖가슴부터 잡혔다. 방에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은 뒤 소파에 앉아 있는데(물론 도넛방석 위에. 자연분만 산모는 회음부가 찢겨 도넛방석 없이는 한동안 어디에도 앉지 못한다) 조리원 원장님이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 "몸은 괜찮으냐" "잠은 좀 잤느냐" 같은 안부를 물으며 자연스레 내 옷의 단추를 끄르더니 속옷 안으로 내 가슴을 주물러댔다. 그 행동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거절은커녕 놀랄 틈도 없었다.

 

"음, 좋네. 내일부터 젖 물려보면 되겠다." 그녀가 다시 단추를 채워줄 때가 돼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고, 오홍홍 웃으며 그녀가 방에서 나간 뒤에야 남편에게 겨우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나 시작부터 가슴 털렸어..."


그러니 이제 와서 반항하겠습니까. 초장부터 가슴을 털렸는데. 조리원 스케쥴에 몸을 맡긴 채 전화 오면 젖 물리고, 노크하면 밀어넣어주는 밥 먹고, 불러내면 마사지 받거나 교육 프로그램을 가장한 각종 영업시간에 불려다녔다(아기 로션 업체에서 와서 마사지 교육 해주고, 육아잡지 업체에서 와서 수유 교육 해주고. 그런 식이다).


신생아는 약 2시간마다 먹는다. 2시간마다 나는 젖병 신세라는 뜻이다. 아기는 아직 빠는 힘이 약해 모유를 먹다 잠들어버리기 때문에 5분 먹이고 10분 재웠다가 10분 먹이고 5분 재우고... 애를 안고 눕히고 다시 안고 이 짓을 반복하다 보면 하루가 휘발된다. 그러면 조리원으로 퇴근한 남편은 가슴을 풀어헤치고 넝마가 된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어미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깔끔하게 완분(완전 분유)을 선언했다면 세상 편했을 텐데. 완모(완전 모유)에 대한 대단한 의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그때 가봐야 안다. 모유 양이 충분한지, 애랑 호흡이 잘 맞을지 미리 알 방법은 없다'는 태평한 마음으로 젖병조차 안 사놓은(우리에겐 쿠팡이 있다) 나였다. 그런데 아기가 내 가슴을 제법 좋아해버린 거다. 내 몸은 준비가 돼버렸고. 준비가 안 된 건 내 정신머리뿐이다.


생각해보면 자연분만을 택한 것도 이런 식이었다. 별 각오 없이 얼렁뚱땅 결정했다. 제정신인가? 그러나 세상에는 쥐뿔도 몰라야 저지를 수 있는 일들이 있는 법이다. 결혼처럼...


자연분만 과정에서도 소위 천국이 있다. 이른바 '무통천국'. 진통 중에 허리에 관을 꽂아 마약성 진통제, 무통주사를 맞으면 진통을 못 느껴 천국을 맛보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제가 천국에 다녀와봤는데요. 진통의 무시무시함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고, 나의 경우 약 13시간 진통을 겪었는데 대학병원 전공의 파업으로 인해 마취과 교수를 기다리느라 무통주사를 조금 늦게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빼앗긴 천국이었다. 제대로 힘 주는 법을 몰라(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살면서 애는 처음 낳아봤다) 의사가 중간에 무통주사를 중단해버렸다. 내가 알아듣고 난리칠까봐 그랬는지 원래 그러는 건지 "무통주사 꺼주세요" 말고 약제 이름을 말하며 끄라고 했는데 밀려드는 진통으로 알아챘다. 물론 그렇다고 다시 켜달라고 조를 기력은 없었다. 정보라의 소설 속 "진통의 파도가 밀려왔다"는 문장의 의미를 그제야 알게 됐다.


이 천국이나 저 천국이나 이름만 천국이다. 조리원 천국이라더니 영 피곤하다는 내 말에 오빠는 "ㅋㅋㅋㅋㅋㅋㅋㅋ"를 연발하더니 "집에 돌아가봐라" 하는 의미심장한, 흡사 두려운 신탁 같은 말을 남겼다. 그리고는 "수유콜 와도 다 가지 말고 패스해. 나중에 후회한다"는 과연 찐육아선배 같은 말도 덧붙였다.


선배의 조언은 대체로 옳고 후배는 그 조언을 어긴 후에야 진가를 아는 법. "이번 수유는 안 하고 저 좀 쉴게요" "이번엔 분유 주세요" 그 말이 왜 이렇게 안 나오는지. 마치 "저 건드리지 말고 애 굶기세요"(오버다. 비리비리한 내 몸에서 나온 모유보다 분유가 영양학적으로는 더 완벽할 것이다) 말하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은 복숭아 요거트 냄새와 비슷한 아기 냄새를 맡으며, 내 가슴을 물고 오물거리는 볼을 보는 게 조금 뭉클한 것도 같다. 땅을 밟은 적 없어 몰캉거리는 발도 이 틈에 실컷 만진다. 이건 너랑 나만 누릴 수 있는 시간이야. 모유는 철저하게 나만이 줄 수 있는 것이라 아기가 나만을 찾는 게 피곤하면서도 뿌듯하다. 남편이 아기를 안을 때면 젖을 찾아 필사적으로 두리번거리는 아기가 우습고 또 기특하다. (남편, 니 가슴은 장식용이지?) 모유를 배불리 먹고 잠든 숨소리는 최고의 업계 포상. 지금도 그 숨소리를 듣고 있다. 그리고 조리원 퇴소를 앞둔 지금, 아기를 안고 집에 가야 하는 비 오는 화요일, 잠든 아기 옆에서 숨죽이고 있는 나는 조리원 천국이 벌써 그리운 것도 같다.



아마도 제일 그리울, 때마다 남이 차려주는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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