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추얼은 위대하다. 약 10년째 매년 연말이면 모이는 멤버가 있다. 대학 시절 시작된 모임이다. 밥과 술을 양껏 먹고 마신 뒤 각자의 '올해 가장 좋았던 일' '올해 가장 아쉬웠던 일' '내년에 해내고 싶은 일'을 돌아가며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건설적인 모임 같은데, 우리가 얼마나 엉망으로 노는지 여기에 서술할 필요는 없겠지… 아무튼 이 모임 덕에 매년 한 해를 갈무리한다. 인생 연말정산이랄까. 브런치에 나만의 인생 연말정산도 기록해두려 한다.
2024년의 기쁨, 행복, 절망, 공포, 분노, 좌절… 그 모든 게 아기와 관련된 일이었다. 2024년에 아기가 태어났으므로 어찌 할 도리가 없이 그렇게 됐다.
2024년의 행복
-엄마가 된 것. 이건 도무지 적지 않을 수 없네. 분만실에서 처음 아기 울음 소리를 듣던 순간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어느 낮, 햇살이 들이치는 거실에서 아기와 서로 눈을 맞추며 웃던 순간. 내 젖을 물다가 잠든 아기를 꽉, 그러나 아기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염려하며 꽉 안았을 때, '내 인생이 완성된 것 같다'고 느꼈던 순간.
-아기 재우고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서 유튜브 틀어놓고 손톱 깎는 시간… 이렇게 행복할 일이야?
2024년의 뭉클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재우려 하기에 옆에 서서 자장가를 불렀더니 빨개지던 엄마의 코끝. 그 노래는 엄마가 어린 내게 매일 불러줬던 자장가였다.
2024년의 뿌듯함
-출산 전부터 진행했던 프로젝트를 결국 마무리해낸 것.
-임신 출산 육아의 와중에 주2회 전화영어를 한 것.
-이유식을 100% 내가 만들어 먹이고 있는 것. 아기새처럼 입을 벌리며 받아먹는 아기의 보드라운 볼을 쓰다듬으면 그것이 극락.
2024년의 아쉬운 일
-또 운전…! 매년 친구들 앞에서 말하는 '올해의 아쉬운 일'은 운전하지 않은 것. 2025년에는 반드시 베스트드라이버가 되리.
-이유식에 미쳐 나만의 글을 쓰는 데 소홀해진 것(육아휴직 기간 목표 중 하나였는데).
-내 몸을 돌보는 데 소홀한 것. 대충 먹고 대충 잔 것. 산후 6개월 황금기에 다이어트 제대로 안 해서 여전히 출산 전 몸무게로 돌아가지 못한 것.
-남편에게 너무 많이 화를 냈다. 아기와 관련해서는 거의 동물적인 분노를 터뜨렸다.
2024년의 분노
-아기가 혼자 그림책을 가지고 놀도록 내버려두어 아기의 조그맣고 여리고 촉촉한 손가락을 종이에 베도록 만든 남편.
-갓난아기 키우고 있는데 둘째 드립 치는 모든 사람들. 이제는 좀 무뎌졌다. 근데 은행에 아기 계좌 만들러 가서도 "둘째 생각 있으세요?" 질문 받았을 때는 몰래카메라인 줄 알았다.
-갑분계엄령.
2024년의 눈물
-아기랑 퇴원해 산후조리원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울리는 전화. 아기가 황달이 심해 같이 퇴원을 못하니 나 먼저 산후조리원에 가야 한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별일 아닌데, 신생아 황달은 정말 흔한 일인데, 피검사 특정 항목의 수치도 안 좋다는 말에 남편에게 안겨 펑펑 울고 말았다. 2024년의 공포이기도 했다.
-며칠 뒤 모든 결과가 좋다며 "지금으로서는 이상 수치가 모체의 영향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고 덧붙인 의사의 한 마디.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눈에 눈물이 맺혔다. 다시 생각해도 눈물 나고 말할 때마다 눈물 난다…
-엄마가 아기 보러 집에 온 날. 겨우 재운 아기 깨웠다고 엄마한테 짜증냈는데 그날 밤에 어버이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후회의 눈물 쏟음. 애를 낳았는데 아직도 생각하는 수준이 애새끼다.
-어느 밤, 벽이 울리도록 우는 아기의 입에 억지로 공갈젖꼭지 밀어넣은 뒤 '이건 학대였다' 자괴감에 울었다.
2024년의 친구
-L선배. 회사 선후배로 만나 그가 퇴사한 이후에도 친구이자 여성동지이자 육아선후배로 이토록 끈끈한 사이가 될 줄이야. 요새는 친언니보다 나의 일상을 더 잘 아는 존재. 그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의 재취업 소식에 조금 울었다. 너무 좋아서. 그녀가 얼마나 안도할지 알아서.
2024년의 소비
-30평대 집을 산 것…!
-산후조리원 저렴한 곳 간 대신에 방문 산후관리사 3주 고용한 것. 한 주 더 했어도 좋았을 듯… 매일 그리워요, 관리사님.
-서재에 놓은 커다란 원목 테이블. 지금도 여기서 노트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앞으로도 많은 문장을 여기서 남기겠지.
2024년의 도전
-질식분만을 택하고 성공한 것. 사실 제왕절개에 비교해 대단한 장점은 모르겠고, 엄마들 모임에서 얘기하면 박수 받을 수 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동네 아기엄마들 모임에 나간 것.
2024년의 콘텐츠
-드라마 '좋거나 나쁜 동재'. 육아의 피로에 절어있는 와중에 남편이랑 둘이서 밤새 정주행.
-'올해의 책'은 늘 어려운데, <일인칭 가난> <거의 정반대의 행복> 둘 다 추천받아 읽었는데 직접 고른 책들보다 단연 좋았다. 그리고 최진영의 단편소설 '홈 스위트 홈'. 말해 뭐해 최진영인데.
2024년의 음식
-분만 후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는 임신 중에 내내 커피를 참았다.) 산후풍이고 나발이고 세상 최고의 해갈.
-남편과 산후조리원에서 도망쳐 "이거 원장님한테 걸리면 디지게 혼난다" 낄낄거리며 나눠먹은 팥빙수 한 그릇. 심지어 나는 회음부 절개 때문에 앉지도 못하고 서서 먹었다. 근데 이 기억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다. 출산 전 '최후의 만찬'이라며 몇 십 만원짜리 파인다이닝 갔던 것보다 더 만족스러웠다. 호르몬의 농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