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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an 21. 2021

이등병이 쏘아 올린 작은 평화

 

“용석 씨 오는 길에 음반가게에 들러서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 앨범 좀 사다 줄 수 있어요?”     


종로 5가에 있는 기독교회관에 가는 길에 평화인권연대 활동가 최정민(오리)의 전화를 받았다. 오리는 병역거부 운동을 한국에서 처음 시작한 활동가다. 지금은 전쟁없는세상에서 함께 활동하는 동료고 아주 가까운 친구지만 2003년에는 서로 존대하는 서먹한 사이였다. 하루 전날 병역거부자이자 학생운동 선배인 나동혁이 다음날 오전에 기독교회관에서 병역거부 관련 중요한 기자회견이 있으니 꼭 오라고 신신당부를 한 터였다. 당시 나는 대학교 마지막 학기를 다니고 있었는데 졸업 후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야겠다는 계획은 없었지만 계속 병역거부운동을 하고 싶었다. 그랬기 때문에 무슨 기자회견인지도 모른 채, 왜 김광석 앨범이 필요한지도 모른 채 기자회견장으로 향했다.


일부러 한 정거장 전인 종로 3가에서 내렸지만 기독교회관까지 가는 길에 음반가게는 없었다. 광화문 교보문고나 명동성당 앞에 음반가게가 있는 것을 알았지만 기자회견 시간을 맞춰 가려면 들렀다 갈 수 없었다. 조금만 일찍 연락을 받았다면 집에서 MP3 파일을 다운 받아 가면 되었는데, 아쉬움을 곱씹으며 기독교회관에 도착해서야 나는 왜 ‘이등병의 편지’ 노래가 필요한지 깨달았다. 기자회견장에는 ‘이등병의 편지-이라크 파병은 절대로 안 됩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 현수막 앞에 군복을 입은 어리숙한 표정의 젊은이가 서 있었다. 그가 바로 현역군인으로서는 최초로 병역거부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강철민이었다.      


강철민 병역거부 선언 기자회견 사진


2003년은 전 세계에서 반전운동이 아주 활발하게 일어난 해였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많은 사람들이 예상한 대로 이라크를 침공했다. 미국의 동맹국인 영국이 대규모의 전투병을 파병했고, 한국 또한 미국의 전투병 파병 압박을 받았다. 미국과 영국을 필두로 전 세계에서 대중적인 반전운동이 일어났다. 평화활동가 중에는 인간방패를 자처하며 이라크로 향하는 이들도 있었다. 특히 이라크에 파병을 하는 나라 활동가들이 많이 참여했는데, 예를 들어 이라크 바그다드에 영국 시민과 한국 시민이 많이 있다면 적어도 영국 정부나 한국 정부의 파병을 막거나 늦추거나 규모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동화작가 박기범, 평화활동가 임영신, 유은하 등이 인간방패를 자처하며 이라크로 향했고, 국내에서도 전쟁반대와 파병반대를 외치는 대중적인 집회가 여러 차례 열렸다.     


결국 한국 정부는 거센 반대 여론 때문에 전투병을 파병하지 못하고 치안 유지와 재건 사업을 담당하는 자이툰 부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했고 국회에서도 파병동의안이 통과되었다. 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전투병을 파병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지만, 어찌 되었든 대한민국은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군인을 파병한 나라라는 오명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병역거부자들과 평화활동가들은 과연 우리나라에서도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에서처럼 참전을 거부한 현역 군인 병역거부자들이 등장할 것인지에 촉각을 세웠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전쟁 반대 운동은 이제 막 기지개를 켜는 한국 평화운동 활동가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사회 곳곳에서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대중적인 대규모 거리 시위부터 징병사무소에 들어가 징병 문서를 탈취해 불태우거나, 전쟁에 쓰일 무기가 생산되는 공장에 들어가 시설을 파괴하는 액션까지 아주 다양했다. 그중에 병역거부가 있었다. 권투 헤비급 세계챔피언인 무하마드 알리가 “나는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챔피언이 되겠다. 베트콩은 우리를 검둥이라고 욕하지 않는다.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라고 선언하며 병역거부를 했다. 당시 병역거부는 매우 대중적인 실천이었다. 진보적인 역사학자 하워드 진에 따르면 1969년 말까지 미국의 병역거부자 숫자는 3만 3,960명에 달했다. 이들은 모두 입영 자체를 거부한 사람들이고, 현역 군인으로서 베트남 전쟁을 반대해서 명령을 거부하거나 탈영한 사람들까지 더하면 그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2003년 당시 한국에서는 전쟁을 반대하며 병역거부를 하는 현역 군인을 상상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병역거부는 특정 종교인들의 예외적인 일탈 행위로 여겨졌고,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훈련소에 입소해서 집총을 거부한 여호와의증인들이 군법으로 실형 3년형을 선고받는 등 가혹한 처벌을 감내해야 했으니 선뜻 병역거부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자이툰부대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탈영병들처럼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민간인 사살 같은 행동을 강요당하는 처지도 아니었다. 파병에 반대하며 병역거부를 선언하는 군인이 등장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냥 우리끼리 둘러앉아 “우리나라에서도 베트남 전쟁 때 미국처럼 군인들이 이라크 전쟁 파병 반대 외치면서 병역거부 하면 얼마나 좋을까?”와 같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기쁘게 상상할 따름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강철민이라는 이등병이 갑작스레 병역거부를 한 것이었다.      


강철민은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병역거부라는 단어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저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기 위해서 뭐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이었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등병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 파병 철회를 주장하며 부대에 복귀하지 않는 것이었다. 신병 휴가를 나와서 예전에 기사에서 봤던 이라크 반전평화팀 지원연대 염창근에게 자신의 뜻을 알렸고, 평화활동가들과 함께 기독교회관에서 농성을 하며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 철회를 주장했다. 현역 군인이 전쟁을 반대하며 병역거부를 하다니, 그토록 고대하던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현역군인으로 병역거부를 선택한 사람이 강철민이 처음은 아니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파병에 차출되자 병역거부를 했던 김이석과 김동희 그리고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다양한 이유로 양심선언을 했던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2003년 당시에는 김이석과 김동희는 알려지지 않았고 양심선언은 병역거부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 강철민이 가져온 충격은 대단했다.      


강철민은 여러 모로 이전의 병역거부자들과는 달랐다. 오태양 같은 평화주의 병역거부자들이나 여호와의증인들은 모든 전쟁을 반대하는 반면 강철민은 총을 들고 우리나라를 지키는 일은 부정하지 않았다. 외국 군대가 우리나라를 침략한다면 자기는 병역 의무가 없더라도 자진 입대해서 나라를 지킬 것이지만 이라크 전쟁에 파병하는 것은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다는 대한민국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에 병역거부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특정 전쟁이나 특정 명령을 거부하는 행동을 선택적 병역거부라고 부른다. 선택적 병역거부자를 우리 앞에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사실 역사상 존재했던 병역거부자들 중 대다수는 선택적 병역거부자다. 가장 많은 병역거부자가 등장하는 시기는 바로 전쟁이 일어날 때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죽을 수도 있고, 내가 다른 사람을 죽여야만 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는 꼭 평화주의자가 아니라도 자신의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베트남 전쟁 당시 3만 명이 넘었던 미국의 병역거부자들도 대부분 선택적 병역거부자였다. 인기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원작 작가인 조지 R.R. 마틴은 훗날 인터뷰에서 나치와 싸운 2차 세계대전이었다면 입대했겠지만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기 때문에 병역거부를 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전쟁 시기의 선택적 병역거부는 대중적인 평화운동으로 폭발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강철민이 짊어져야 할 역사의 무게를 걱정하면서도 그의 선언을 마음 깊이 반겼다.      


농성을 마치고 청와대로 행진하는 날의 사진.


강철민과 함께 한 농성은 오래가지는 못했다. 강철민은 2003년 11월 28일, 약 일주일간 이어진 농성을 접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하면서 청와대로 행진하는 중에 연행되었고 결국 다른 병역거부자들처럼 실형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항소심 재판 판사는 “실정법상 어쩔 수 없이 처벌하지만 강철민 군의 행동은 분명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철민의 병역거부가 한국군의 파병을 막거나 지연시킨 것은 아니었다. 자이툰 부대는 예정대로 파병되어 활동했고, 2004년에는 한국인 김선일 씨가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되어 참수당하는 비극적인 일도 발생했다. 그리고 2020년의 한국은 2003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 세계 전쟁 시장에서 중요한 행위자가 되어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방비를 쓰는 10개국에 7년 연속으로 포함되었고, 한국산 무기와 시위 진압장비가 바레인, 예맨, 태국, 웨스트파푸아 등지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강철민의 병역거부는 일사불란하게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군대라는 집단에서도 자신의 양심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 사회에 일깨워 줬다. 강철민이 쏘아 올린 작은 평화 덕분에 우리는 병역거부가 전쟁에 저항하는 직접행동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경험했다. 병역거부자를 감옥에 가두 말 것, 다시 말해 양심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주장했던 병역거부자와 평화활동가들은 점차로 병역거부가 전쟁에 저항하는 시민불복종이라는 것을 체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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