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거부 운동은 출발과 동시에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그만큼 어려움도 컸다. 1만 명 넘는 여호와의증인 병역거부자들의 존재는 분명 이 문제가 사회적인 주목을 받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여호와의증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정치적인 행동이나 발언을 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행동이 정부에 저항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오태양이 등장하기 전까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당사자가 없었고 병역거부는 특정 종교의 이상한 행동이라는 사회적 편견에 시달렸다. 이를 깨기 위해서라도 활동가들은 한국에서의 병역거부 역사를 복원하려고 애썼다.
병역거부는 세계사적으로 종교적 신앙을 지키려는 종교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서기 295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로마군의 징집을 거부해 처형당한 막시밀리아누스가 공식 기록에 등장하는 첫 병역거부자다. 그 이후 중세 유럽에서는 소수 평화주의 교파의 종교인들이 병역거부를 이어갔다. 병역거부가 평화운동으로 거듭난 것은 20세기 초반 세계 1차 대전 때였으니, 아주 오랫동안 병역거부의 양심은 종교적 양심이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병역거부라는 이름조차 없던 시절, 여호와의증인들은 군대를 거부하고 감옥으로 향했다. 특정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 인권의 문제임을 호소하기 위해 2000년대 초반 인권활동가들과 연구자들이 발굴한 병역거부자들도 종교인이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신자들은 여호와의증인 신자들처럼 종교적 신앙에 따라 병역거부를 했다. 종교사회학자 강인철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56년부터 1976년까지 병역거부로 수감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신자는 모두 97명이었다. 안식교인들은 유신시대를 거치면서 병역거부를 포기하게 되는데, 이는 국가폭력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 안타까운 일이었다. 여호와의증인이나 재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처럼 신자들이 함께 병역거부를 한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병역을 거부한 기독교인들도 있었다. 기독교 장로교 신자인 문기병은 1958년 집총훈련을 거부하여 6개월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 중앙신학교를 중퇴한 홍명선은 함석헌이 세운 씨알농장에 들어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병역거부를 했는데 퀘이커의 병역거부에 크게 감명을 받은 함석헌의 영향을 받았다.(「양심적 병역거부자, 언제까지 감옥으로 보낼 것인가?」 자료집 중 강인철 발표문)
병역거부자들에게 가장 가혹했던 1970년대 유신 시대에도 종교인들은 병역거부를 이어갔다. 여호와의증인들이 그랬고, 기독교인 김홍술과 불자인 효림은 개인적으로 병역거부를 했다. 김홍술은 1978년 “형제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게 싫다며” 병역거부를 했고 실형 3년을 선고받아 수감되었다. 출소 후에는 목사 안수를 받고 부산 지역에서 빈민운동을 이어갔다. 효림 스님은 군대에 입대한 뒤 병역거부를 선언한 선택적 병역거부자였다. 유신 시대 말기 군 입영영장이 나와 입대했지만 수행자로서의 양심에 위배되는 군 훈련을 받으면서 가치관의 혼란을 많이 느끼고 결국 병역거부를 택해 감옥살이를 했다. 효림 스님은 2000년대 초반 결성되어 병역거부 운동을 이끌었던 ‘양심적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의 대표를 맡아 병역거부자들을 활발히 지원하기도 했다. 이처럼 여호와의증인과 소수 종교인이 이어간 병역거부는 2000년대 병역거부 운동의 등장과 함께 종교적으로도 폭이 넓어졌다. 퀘이커와 더불어 대표적인 평화교회인 메노나이트 교회의 신자들, 신학대 학생들, 가톨릭 신자, 성공회 신자와 불교 신자들이 병역거부를 이어가고 있다.
정치적인 병역거부자들도 존재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다양한 이유로 군복무를 거부한 현역 군인들이 등장했다. 당시에는 이들의 행동을 가리켜 ‘양심선언’이라고 불렀다. 1991년 대학생 강경대가 강경진압으로 죽자 전투경찰대의 해체를 주장하며 부대를 이탈해 양심선언을 한 박석진과 육군보안사령부가 민간인을 사찰해온 사실을 폭로한 탈영병 윤석양 등이 대표적이다. 그 밖에도 대학시절 정보기관의 프락치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거나, 독재자 전두환이 머무는 백담사를 지키는 업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이유 등 다양한 이유로 병역거부를 한 사람들이 50명이 넘었다. 이들은 몇 명은 “군부독재 청산, 군민주화, 당사자들의 명예회복” 등 정치적인 구호를 내걸고 함께 농성을 했다. 아직 병역거부라는 단어조차 생소한 시대였기 때문에 이들이 스스로를 병역거부자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고, 군대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들을 평화주의자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명령이나 행동을 거부하고 기꺼이 처벌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들의 양심선언은 시민불복종으로서 병역거부였다.
전쟁이 국제적인 사안이듯 병역거부도 국제적인 저항이다. 한국과 연관된 다른 나라 병역거부자들도 찾아냈다. 『독재에서 민주주의로』를 써서 독재 권력과 맞서는 전 세계 민중들에게 영감과 비폭력 직접행동의 이론을 전했던 진 샤프는 한국전쟁 당시 병역거부를 했다. 철저한 비폭력주의자였던 그는 전쟁은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효과적인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병역거부자 중에는 훗날 한국 정부에서 수여한 훈장을 받은 이도 있다. 퀘이커 신자였던 존 콘스는 1951년 징집영장을 받았고 비폭력 평화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병역거부를 했다. 그는 전쟁의 공포를 피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전쟁으로 폐허가 된 당시 한국에서 대체복무를 수행하기를 희망했다. 의사였던 그는 1954년부터 군산의 한 병원에서 대체복무로써 의료봉사를 했고, 한국 정부는 당시 전후 재건에 존 콘스가 큰 기여를 했다며 2013년 수교훈장을 수여했다. 2013년만 하더라도 한국의 병역거부자들은 예외 없이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한국 전쟁 당시의 병역거부자에게 한국 정부가 훈장을 주었다니 역사의 아이러니처럼 느껴질 따름이다. (존 콘스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전쟁없는세상 블로그 글을 참고하세요)
2000년대 새롭게 등장한 평화주의자들, 정치적 병역거부자들의 스펙트럼은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해졌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정치적인 주장이 없이 병역거부를 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예전이라면 병역기피라고 불렸을 수도 있는 이들이었다. 여호와의증인에서 정치적 병역거부자, 평화주의자로 확장되었던 우리의 시선은 한 번 더 넓어졌다. 시선이 넓어지니 보이지 않던 이들이 보였다. 역사상 가장 많은 병역거부자들이 등장했던 베트남 전쟁 당시, 전 세계적으로 반전 운동의 물결이 거셌지만 한국에서는 병역거부도 반전운동도 없었다고 아쉬워하던 그 시기에 한국에서도 병역거부자들이 존재했다. 김진수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미군 복무 중에 베트남으로 파병되었고, 휴가지인 일본에서 탈영하여 쿠바 대사관에 망명 신청을 했다. 그는 중국, 소련을 거쳐 결국 스웨덴으로 망명을 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나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행하고 있는 현재의 방식을 바꾸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게다는 나는 오늘날의 한반도의 비극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되어, 확실한 변혁의 가능성을 가져다줄 수 있는, 그래서 현재의 한반도 사람들에게 재통일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뭔가를 해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을 전하기 위해 탈영이라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미군이었던 김진수뿐만 아니라, 한국군에서도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며 병역을 거부한 이들이 있었다. 제주 출신 김이석을 어려서 제주 4·3과 한국전쟁을 몸소 겪었다. 그럼에도 군입대가 의무라는 생각에 군에 입대하지만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자 탈영을 하고 일본으로 밀항한다. 감리교 신자이기도했던 김이석은 자신의 신앙과 양심에 비추어 베트남 전쟁이 잘못된 일이고 가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훗날 김이석은 일본 정부에 발각되어 한국으로 강제송환되었고 그 이후의 삶은 알려져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제주 출신인 김동희 또한 군대에서 베트남 파병 명령을 받고 탈영하여 평화헌법으로 알려진 일본의 헌법 9조를 언급하며 일본에 망명 신청을 한다. 망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후 그는 소련을 경우하여 1969년 북한으로 망명한다.
알아야 보이고 아는 만큼 보인다. 예전이었다면 기피자, 탈영병으로만 불렸을 이들의 행동을 우리는 병역거부로 의미 지을 수 있게 되었다. 한국 병역거부의 역사를 보면 병역거부의 의미가 확장되는 과정이 뚜렷하게 보인다.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에서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시민불복종으로, 다시 국가에 의해 배제된 이들의 행위로 병역거부는 넓어져갔다. 이 확장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대체복무제가 도입된 2020년 이후 한국에서는 또 다른 병역거부자들이 등장할 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