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오태양의 병역거부 선언 이후 아주 천천히, 그렇지만 굉장히 꾸준히 병역거부자들이 나타났다. 초기 병역거부자들은 주로 활동가 출신이었다. 오태양은 불교 신자이면서 정토회에서 북한 어린이 돕기 운동을 하던 평화활동가였고, 같은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면 병역거부를 한 유호근은 민족주의 계열 학생운동 그룹에서 활동했다. 나동혁은 맑스레닌주의를 표방한 학생운동 그룹의 활동가였다. 이 셋은 개인 성격만큼이나 관심사도 달랐다. 나동혁의 말에 따르면 대체복무제 도입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이야기를 나누는데, 오태양은 의료시설이나 노인시설에 가서 봉사활동하자고 하고 유호근은 배 타고 연평도나 아무튼 남북 접경지역에 가서 평화를 위한 퍼포먼스를 하자고 제안했는데 자기는 그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기질도, 사상도, 양심도 제 각각인 병역거부자 세 명이 모여 서로 자기가 관심 있는 활동 하자고 열심히 서로를 설득하는데 누구도 다른 이에게 설득당할 마음이 없는 그런 장면을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은 세상에서는 파란 하늘을 상상할 수 없지만 잠시 구름 사이 틈으로 드러난 파란 하늘과 눈부신 하늘을 한 번 본 사람은 그것을 잊을 수 없는 것처럼, 오태양을 통해서 군대를 거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병역거부자들은 더 이상 병역거부를 모르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현실적인 고민과 제약, 사회적 편견 속에서도 병역거부자들은 꾸준히 등장했고 오태양과 유호근과 나동혁의 차이는 차이도 아닐 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병역거부를 했다.
종교계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오태양에 이어 대학생 불교연합 활동가였던 김도형이 종교적 신념으로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총을 들고 살인 훈련을 받은 손으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했던 평택초등학교 교사 김훈태 또한 불교 신자였다. 가톨릭 교회에서도 병역거부자들이 등장했다. 청소년 시절까지 신부님이 꿈이었던 고동주는 유호근의 병역거부 뉴스를 보며 병역거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병역거부자가 되었다. 고동주의 병역거부를 계기로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한국 교회와 병역거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토론이 이어졌다. 우리신학연구소, 천주교인권위원회, 서울지역 가톨릭학생회 연합회들이 나서서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논쟁을 불 지폈다. 가톨릭 교회의 ‘정의로운 전쟁론’ 교리를 둘러싼 해석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고 가톨릭 교회에서는 아주 중요한 문서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사목헌장> 제79항에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대체복무의 필요성을 이야기한 구절이 있다는 것도 찾아냈다.
“양심의 동기에서 무기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위한 법률을 인간답게 마련하여, 인간 공동체에 대한 다른 형태의 봉사를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사목헌장> 제79항
고동주의 영향을 받아 서울지역 가톨릭학생회 연합회에서 같이 활동한 백승덕이 병역거부를 선언했고, 이후 홍원석이 병역을 거부하며 가톨릭 교회에서 병역거부를 이어갔다. 기독교에서도 병역거부자들이 등장했다. 평화활동가들과 인연이 있던 박정경수가 병역거부를 했고, 진보적인 기독교 매체인 〈복음과 상황〉에 실린 박정경수의 기사를 본 이상민도 병역거부를 했다. 이상민의 친구로서 이상민이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후원회장을 맡은 조성현은 훗날 예비군 훈련 거부를 했고, 조성현과 알고 지내던 김형수 또한 예비군 훈련 거부를 고민하던 중 조성현의 소식을 듣고 병역거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장애인권 활동가 권순욱, 신학대 학생회장 하동기 등도 기독교인으로서 병역거부를 한다. 한편 한국 기독교 병역거부자들의 이야기에서 여러 차례 언급되는 이름이 있는데, 기독교 공동체인 개척자들의 송강호다. 조성현, 김형수 등 여러 기독교 청년들은 송강호의 강의를 들으며 병역거부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종교처럼 확연하게 드러나는 건 아니지만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흐름도 이어졌다. 초기 병역거부자들은 군인을 영웅으로 만드는 군사주의에 저항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 또한 반군사주의 운동의 남성 영웅이 되었다.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회적 비난을 이겨내는 강한 신념을 가진 이들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초기 병역거부자들의 소견서를 보면 부드러운 언어를 구사하지만 그들의 발언에는 확신에 가득 차 있고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런 상황에서 유민석의 등장은 잔잔한 충격을 주었다. 유민석은 말과 글이 유려했지만, 그 속에 자신의 떨림과 불안 무엇보다 나약함을 숨기지 않았다. 전쟁 영웅(군인 남성)과 평화 영웅(병역거부자 남성)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신의 유약함과 나약함을 그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성답지 ‘못한’ 섬세함과 나약함을 유민석은 병역거부의 언어로 삼았다. 지금이야 병역거부 운동에서 페미니즘의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이 상식이 되었지만, 병역거부 운동이 이제 막 시작된 2000년대 초반에는 병역거부 운동을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펼치는 게 대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유민석의 병역거부는 여성 활동가들이 기자회견이나 토론회에서 마이크 잡고 사회 보고 발언하는 수준(물론 이것도 중요한 일이다. 특히 병역거부 운동은 더 많은 여성들에게 더 중요한 책임과 권리를 부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을 넘어서, 병역거부 운동의 언어가 어떻게 페미니즘과 만날 수 있을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유민석의 등장 이후로 많은 병역거부자들은 더 이상 용감하지 못한, 강인하지 못한, 다시 말해 소위 ‘남자답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지 않았고 그 나약함에서 병역거부를 사유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유는 종교적 병역거부자들 혹은 사회운동 그룹의 병역거부자들처럼 조직화된 형태는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병역거부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사유에 스며들었다. 자신의 몸에 각인된 남성성에 대한 성찰이 병역거부의 핵심적인 사유인 현민과 김경묵의 소견서가 대표적이다. 두려움이야 말로 용기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나에게 행해지는 폭력, 내가 행사하는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용감한 사람이 아니라 용감한 척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애써 폭력적인 태도를 취한다. 반면 진정 용감한 사람은 두려움을 깨닫고 살펴볼 줄 아는 사람, 무섭지만 두려움을 마주 보는 사람들이다. 두려움을 인정하는 섬세함이 폭력을 성찰할 수 있게 한다.
병역거부의 이유뿐만 아니라 병역거부의 시기나 형식도 다양해졌다. 군 입대 이후에 현역 군인 신분으로 병역거부를 선언한 사람들이 등장했다. 앞서 살펴본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며 병역을 거부한 이등병 강철민이 시작이었다. 병역거부를 고민하다가 결국 그나마 총을 들지 않는 일로 군복무를 마치려고 의무경찰에 지원한 이길준은 경찰로 군복무를 하던 중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를 마주한다. 시민들을 보이지 않게 때리라는 명령을 흔쾌히 따르지도 거부하지도 못하던 이길준은 진압복 안에 숨어 울며 “영혼이 하얗게 타들어가는 고통”의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병역거부를 결심한다. 군대에 갔다 온 뒤에 예비군 훈련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조성현이나 김형수의 경우에도 군 입대 전에도 분명 병역거부에 대해 고민했지만 여러 가지 상황과 사정으로 군대에 입대하고 제대 한 뒤에 예비군 훈련을 거부하는 병역거부자가 된다. 이들은 군대에서 급격한 생각의 변화를 겪었다기보다는 자신의 양심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명령이나 군대의 결정을 마주하거나(강철민과 이길준의 경우) 원래도 가지고 있던 병역거부에 대한 생각이 더 확고해져서(이길준, 조성현, 김형수의 경우) 병역거부자가 되었다. 한편에서는 이들이 군데 입대한 사실을 가지고 어떻게 양심이 변하냐며 비난한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야 말로 국가 폭력 앞에서 개인이 양심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반증이고, 그렇기 때문에 무너지거나 굴복하기 쉬운 우리들의 양심을 사회적으로 지켜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2010년대 들어서는 병역거부자 난민과 여성 병역거부자들도 등장했다. 이 이야기는 다른 챕터를 위해서 아껴두겠다.)
이 글에서는 중요한 흐름으로 묶을 수 있는 병역거부자를 중심으로 이야기했는데, 이야기하지 않은 더 다양한 병역거부자들이 있다. 농사꾼이 낫질을 배워야지 왜 총질을 배우냐며 병역거부를 한 이도 있고, 퀴어 정체성에 기반한 병역거부자들도 여럿 등장했다. 이 다양한 양심은 당연하게도 당대의 국가 폭력과 만난다. 2000년대 초반에는 이라크 파병과 김선일 씨의 죽음이, 2000년대 중반에는 평택 미군기지 반대 싸움에서 정부와 군대가 보여준 모습이 병역거부자들의 마음에 깊은 각인을 새겼고,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용산참사 때 공권력의 폭력이 병역거부를 결심하게 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병역거부자들은 세월호 참사와 국가의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결과가 병역거부로 이어진다. 병역거부는 양심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이 사회에서 국가와 공권력의 역할에 대한 도전적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군대가 왜 존재하는가?
국민국가에서 안보란 무엇인가?
국민을 지키지 않는, 혹은 지키지 못하는 국가라면 우리는 공동체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병역거부자들이 등장과 함께 질문들이 켜켜이 쌓여간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병역거부자들에게 무수한 질문과 질문을 가장한 공격을 서슴없이 던졌다. 이제 우리 사회가 병역거부자들이 던진 질문을 고민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