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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Feb 14. 2021

병역거부자들의 슬기로운(?) 감빵생활


병역거부 강연에서 만난 분들은 기자들과는 다르게 감옥생활을 가장 궁금해했다. 강의가 지루한지 한두 명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면 나는 예의 감옥 이야기를 꺼내곤 한다.      


“월남전 참전 용사 출신이라던 아저씨가 자기보다 늦게 들어온 분을 함부로 대하더라고요. 욕하지 말고 말씀하시라 했더니 저한테 달려들었던 적이 있었어요. 물론 아무 일도 안 일어났어요. 감옥에서 싸우면 징벌방 가거든요. 조선족 밀입국 브로커 하다가 잡혀온 아저씨는 겨울에 감기 걸린다고 씻지를 않는 거예요. 우리 방에 보름 있었는데 세수나 양치도 안 해서 냄새가 너무 심했어요. 일본에서 소매치기하다 잡혀온 아저씨는 명품을 좋아하는데 자기 돈으로 명품 사는 걸 주변에서 뭐라 한다며 투덜댔어요. 나더러 출소하면 연락하라고, 자기가 기술 가르쳐주겠다고 그러면 일본 가서 소매치기 같이 하자고 했어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졸던 사람들도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을 한다. 나도 옛날이야기에 심취해 한참을 떠들다 정신을 차리곤 한다. 사실 많은 병역거부자들이 감옥 이야기가 나오면 말을 쏟아낸다. ‘진짜 사나이’나 ‘가짜 사나이’를 볼 땐 한 마디도 안 하다가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보면서는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며 아는 척을 늘어놓는 셈이다. 군대 다녀온 남성들이 만나면 만날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하고 자기가 지낸 부대가 가장 힘들고 어려웠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는 것처럼, 병역거부자들도 자기가 지낸 감옥이 가장 안 좋았다고 이야기하며, 그 안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대결하듯 이야기를 꺼내어 놓는다. 예비역들이 자신의 군생활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병역거부자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감옥생활이 의미 있는 시간이었기를 바라기 때문일지도. 병역거부자들도 별 수 없는 사람이다.     


병역거부자들의 수감 기간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한국 사회 전반이 군사화된 병영국가로 거듭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시대에는 최장 7년 10개월까지 옥살이를 했다. 출소하는 병역거부자가 교도소 문을 나서기도 전에 병무청에서 다시 입영영장을 들고 와서 다시 감옥으로 끌고 가는 식이었다. 지금으로선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유신시대에는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억지로 훈련소에 끌고 가 총을 쥐어주고는 거부하면 구타를 했는데, 이때 목숨을 잃은 병역거부자가 알려진 사례만 다섯 명이다. 이후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실형 3년을 선고받고 복역했고 병역거부 운동이 시작된 2000년 이 문제가 사회 이슈로 등장하고 나서부터 실형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되었다.      


감옥에 갇힌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2006년 8월 17일, 더위가 한풀 꺾인 늦여름의 어느 금요일, 인천지법 부천지원에서 1심 선고공판이 열렸다. 판사는 내게 실형 1년 6개월을 선고했고 나는 법정에서 바로 구속되어 호송차에 실려 인천구치소로 갔다. 법정구속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황스럽지 않았지만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로 일하러 나간 엄마의 얼굴이 잊히질 않았다. 감옥생활에 대해 말하는 일은 굉장히 조심스럽다. 병역거부자들마다 경험이 굉장히 다른데, 자칫 내 경험이 병역거부자들의 일반적인 경험처럼 비칠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다. 감옥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겪는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법무부 장관이 누구인지, 교도소장이 누구인지, 보안과장이 누구인지가 때로는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보다 우선하기도 한다. 그래서 감옥인권 활동을 하는 인권활동가들은 수용자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서 해당 사항을 명확하게 법률과 시행령으로 규정하고 개선해나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주 일상적으로는 방에 같이 기거하는 사람들의 성격이나 그 방의 문화에 따라 경험이 천차만별로 달라지기도 하고, 수감자 본인의 성격이나 정체성에 따라 다양하게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각각의 경험이 다르지만 병역거부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도 있다. 감옥이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사실이다. 감옥 밖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은 감옥 안에서도 잘 나가고 감옥 밖에서 차별받고 배제되는 사람은 감옥 안에서도 그렇다. 우선 돈 많은 사람들은 감옥 안에서도 대접받는다. 재벌 총수까지 갈 것도 없이 영치금 넉넉해서 방 사람들에게 훈제 닭다리라도 한 번씩 돌리는 사람은 남들이 뒤에서 욕할지언정 앞에서는 “사장님, 사장님”하고 부르며 대접해준다. 청주교도소에 있을 때 여호와의증인들과 함께 생활을 했는데, 가장 어린 이가 신체검사를 받고 곧바로 병역거부를 한 스무 살인 분이었다. 들어오기 전 도살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그는 키가 작고 귀여운 스타일이었다. 다른 재소자들은 나이도 어리고 만만해 보이는 그 이를 함부로 대했는데 반면 그 이보다 다섯 살 많은 서울대 나온 여호와의증인에게는 깍듯하게 대했다. 감옥에 들어앉아 있는데 대학 졸업장이 무슨 소용이냐 싶었는데, 나중에 크게 되면 다들 뭐라도 신세 질까 싶어 하는 눈치들이었다. 남자다운 사람, 돈 많은 사람, 학벌 좋은 사람, 빽 있는 사람은 대접받고, 여성스러운 사람, 영치금도 없는 사람, 가방끈 짧은 사람, 면회도 편지도 없는 사람들은 대접도 못 받았다.      


형이 확정된 모든 재소자들은 의무적으로 일을 해야 한다. 징역(懲役)은 ‘일을 시켜(役) 벌을 준다(懲)’는 뜻이다. 여러 일들 가운데 교도소가 운영되는데 꼭 필요한 일들을 관용부라고 한다. 취사장, 교도소 청소, 영치(물품과 금전 관리), 총무(서신과 도서 관리) 등이 관용부가 하는 일이다. 이 일은 교도관들의 사무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비교적 업무환경이 좋다. 쉽게 말하자면 여름에 얼음물, 겨울에는 온수를 마음껏 쓸 수 있는 드문 곳이다. 그래서 대부분 관용부를 하고 싶어 했지만 관용부 선발 기준은 좀 엄격한 편이었다. 교도관들과 접촉이 잦기 때문에 사고가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교도관들이 책상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은 담배, 칼, 가위 등 소내 금지물품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거짓말 안 하고 딴짓 안 하는 여호와의증인들이 관용부 일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대체복무제가 도입되면 관용부는 누가 하냐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나를 포함한 정치적 병역거부자들의 위치는 독특했는데, 우리는 여호와의증인들과 정치범의 어정쩡한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일을 할 때는 여호와의증인처럼 관용부 일을 주로 했지만, 다른 재소자들이나 교도관들이 여호와의증인에게 함부로 대하듯 우리를 대하진 않았다. 민가협이나 인권운동사랑방처럼 감옥인권운동으로 감옥 안에서도 유명한 단체들이 보내주는 우편물이 병역거부자들의 위상을 높여준 덕분이고, 감옥 안에서는 편지 많이 오고 면회 많이 오는 것도 은근한 권력으로 작용하는데 병역거부자들은 평균적으로 편지도 면회도 많은 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병역거부자들은 대체로 고학력자들이었고 학벌도 좋은 편이었다. 내가 군산교도소 취사장에서 일할 때, 45명 가운데 대학 나온 사람이 3명이었는데 그중 두 명이 병역거부자였고 우리가 나온 대학은 서울에 있는 4년제였다. 이처럼 대학 나온 사람도 드문 곳에서 명문대학 졸업장이 갖는 위상은 생각보다 컸다.      


친구들이 면회 와서 찍어준 감옥 사진이 싸이월드에 있는데 백업을 안 받았다. 감옥 안은 아니지만,  출소하는 날 호송차량을 타고 정문을 나와서 내릴 때 친구들이 찍어준 사진


감옥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의 성격 또한 살펴볼만한 점이 있다. 병역거부자인 현민이 자신의 감옥 생활을 바탕으로 쓴 책 『감옥의 몽상』에서 감옥에서의 노동이 어떻게 성별화 되어 있는지 탁월하게 분석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돌봄 노동은 흔히 여성화되어 있는데, 여성화된 노동은 남성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교도관과 재소자 모두가 피하고자 하는 필수 노동이다. 꼭 필요한 노동이지만 교도관이 재소자를 돌보는 것은 교도관이 수인의 비서(여성화)가 되어 곤란하고 재소자는 보살핌을 받는 무력한 대상(유아화)이 되어 곤란한 일인데, 관용부 중 하나인 소지가 이 곤란함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분석한다. 소지는 재소자들이 기거하는 사동에서 창살에 갇힌 재소자들에게 온갖 물품과 식사, 약품을 전달하는 관용부다. 재소자들도 교도관들도 편히 부려야 하니 주로 나이 어린 남성이 하게 되고 여호와의증인이 하는 경우도 많다.    

  

다른 재소자들에 비해 조금 편한 관용부 일을 하거나 처우가 나쁘지 않다고 해도 감옥은 감옥이었다. 감옥에선 누구든 속절없는 고립감과 외로움에 마음이 다치기도 하고, 큰 대자로 누워 스트레칭 하나 마음껏 할 수 없는 좁아터진 실내생활과 부실한 영양 상태 때문에 몸이 상하기도 한다. 몸의 고통이 마음의 통증으로 이어지고, 마음의 병이 몸의 고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고된 업무로 목 디스크에 걸리고, 추운 겨울 난방이 안 되는 방바닥에서 자다가 구완와사에 걸리고, 방한용품도 제대로 없어서 손발 끝에 동상이 걸리는 일을 겪는 것이 재소자들에게는 특별한 일이 아니고 병역거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채식을 하는 병역거부자들은 건강을 챙기는데 더욱 어려움을 겪었다. 내 경우에는 수원구치소에 있을 때 허구언 날 코피가 흘렀다. 의무과에 갔는데 의사는 불가능한 처방을 내렸다. “아파트형인데다 창문이 작아서 수원구치소가 환기와 통풍이 안 좋습니다. 출소를 하거나 이감을 가셔야 합니다.”       


그렇다고 병역거부자들의 감옥생활을 불쌍하게 볼 일은 아니다. 병역거부자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했고, 감당할 따름이다. 자기 몫의 삶을 사는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은 실례다. 다만 감옥 생활이 그저 버티거나 보내면 되는 시간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감옥생활은 꽤나 강렬한 경험이고 그러다 보니 출소 이후의 삶에 다양한 방식으로 많은 흔적을 남긴다. 전과로 인해 직업선택의 폭이 줄어드는 것은 차라리 부차적으로 보이는 경우도 많다. 몸과 마음이 무너져버린 경우라면 흔적은 상처가 되고 쉽게 아물지 않는다. 부디 병역거부자들의 몸과 마음에 남겨진 징역살이라는 흔적이 갈수록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빛깔을 띄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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