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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an 14. 2021

엄마는 내가 4학년 때 학교 가기 싫어했다고 한다. 반마다 있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고 그리고 집도 잘 사는 아이와 내가 사이가 안 좋았다. 한 번은 그 애랑 싸웠다. 당연히 주먹싸움은 안 했다. 싸움은 상대방이 잘하는 방식은 피하고 내가 잘하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 말싸움이었다. 싸우는 도중에 담임이 들어왔다. 담임의 얼굴과 이름 모두 똑똑히 기억한다. 아마도 둘 다 조금씩 잘못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담임은 나만 혼냈다. 반 아이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나만 꾸중을 들었다. 나는 무언가 변명을 하려 했다. 담임은 내 대답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시끄러. 말만 많은 녀석이."


말만 많은 녀석. 그때의 억울함, 모욕감은 잊히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말이 많은 사람이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말이 많고, 말을 잘한다. 말을 잘해서 말이 많은 건지, 많이 하다 보니 잘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초등학생 때 처음 받은 상장이 발표상이었으니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말이 많았던 거 같다. 


사실 나는 말 잘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말은 글과 다르게 순발력이 중요하다. 깊이가 좀 떨어져서 순발력 있게 반응하는 사람은 말을 잘한다는 평을 듣는다. 사실관계가 조금 틀려도 듣는 사람이 바로 확인할 수 없으니 지적당하지도 않는다. 과장을 하거나 왜곡을 해도 금방은 들키지 않는다.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는 말이 있는데, 내 기준에서는 "말 많으면 사기꾼"이다. 사실 정치인, 종교인, 운동권 모두 말로 먹고사는 이들이고, 어느 정도는 사기꾼 기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내가 남들보다 그나마 잘하는 게 디자인도 아니고, 손재주를 요하는 일도 아니고, 노래도 아니고, 운동도 아니었고 말하는 거였으니 나는 부지런히 말을 했다. 말을 잘해서 인정받기도 하고, 말을 많이 하다 보니 실수도 많이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그래도 별 수 없었다. 잘하는 걸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게 못하는 걸 잘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다. 다만 4학년 때 담임이 싫어서 "말만 많은 새끼"가 되지 않으려고 애썼다. 행동하지 못할 건 말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을 많이 하고 살았지만 하루에 다섯 마디도 안 하고 살던 시절도 있다. 그때 나는 내가 말을 하지 않고 사는 것에 큰 불편이 없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수원구치소 독방에서 지낸 시절, 두세 달이었는지 네다섯 달이었는지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 시절이 내 인생에서 가장 말을 하지 않은 시절이다. 


그때 나는 대화하고 싶은 사람이 없었다. 아니 대화하기 싫은 사람만 넘쳐났다. 비리를 저질러 구속되어놓고 대추리 집회 가면 얼마 받냐고 데모 나가면 일당 받는 거 다 안 하고 말하던 수원시 공무원, 내 돈으로 명품 사는 게 뭐가 문제냐고 투덜대고 드라마에 정의로운 캐릭터만 나오면 욕을 해대던 일본에서 잡혀온 소매치기 아저씨, 보름 넘도록 씻지도 않고 냄새 때문에 좀 씻으라고 말하던 우리에게 성질을 내던 조선족 밀입국 브로커 할아버지. 나는 그들과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독방을 신청했고, 집시법 위반 재판을 받고 있던 덕분에 정치범으로 취급되어 독방을 쓰게 되었다. (당시 병역거부자 수감자들은 대부분이 여호와의증인이었기 때문에 덩달아 정치적 병역거부자들도 여호와의증인 취급을 했다)


독방에 있는 동안은 한마디도 안 하고 지나간 날들도 있었다. 언어가 부족하다는 느낌은 안 들었다. 책을 읽고, 편지를 읽고, 편지를 쓰는 일이 하루의 대부분이었으니 말과 글이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친구들이나 가족들이 면회를 오면 오랜만에 말을 하는 나머지 목소리가 갈라지기 일쑤였다. 


그 뒤로는 계속 말을 많이 하며 살았다. 편집자로 일하던 시절에는 상대적으로 말할 일이 적었지만,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역시나 말을 많이 해야 했다. 조합원들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사측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상급노조를 만나서 이야기하고, 다른 회사 노조를 만나서 이야기했다. 다시 전쟁없는세상에 복귀해서는 말할 일이 더 많았다. 사회운동이란 대체로 무언가를 주장하는 일이니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건 기본적인 업무였다. 돈 들여 홍보도 하는 마당에 나는 말할 기회나 글 쓸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다. 집회에서 발언하고, 기자회견에서 사회를 보고, 토론회나 공청회에서 발표를 하고, 강의 요청이 들어오면 거절하지 않고 강의를 했다. 병역거부를 고민하는 사람들을 상담하는 일은 듣기 또한 중요하지만 역시나 말하기도 중요했다. 


한 사람이 평생 동안 할 수 있는 말의 양이 정해져 있다면, 사람마다 그 양이 다른데 나는 다행히도 좀 많은 편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일생 동안 할 수 있는 말을 다 해버린 게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다. 사람이 죽는 게 신체가 기능을 멈춰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말의 총량을 다 써버려서 죽는 거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좀 더 오래 살려면 이제는 말을 극도로 아껴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요즘은 입을 닫고 말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너무 많은 말을 이미 다 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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