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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Mar 30. 2021

좌절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병역거부 운동의 좌절을 비폭력 트레이닝으로 극복하다

     

가석방 출소를 한 달 앞둔 2007년 9월, 아주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노무현 정부가 드디어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국방부는 치매 노인이나 중증 장애인을 돌보는 사회복지 영역의 대체복무를 2009년 3월부터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정부에서 대체복무제 도입을 준비하고 있고 멀지 않아 공식적으로 발표할 거라는 것은 전쟁없는세상 친구들이 편지로 보내주어 알고 있었는데 그게 내가 출소하기도 전에 발표가 날지 몰랐다. 알고도 기쁜 일이란 이런 걸까. 비록 나는 감옥살이를 다 하고 나가지만 앞으로 병역거부를 할 친구들은 감옥에 안 와도 되니 커다란 출소 선물처럼 느껴졌다. 약간의 불안감도 있었다. 정책을 추진해가야 할 노무현 정부의 임기가 몇 달 남지 않았고 당시 민주당의 인기는 바닥이었기 때문에 다가오는 12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어 정권이 교체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리고 인권과 평화에 관심도 책임감도 없는 이명박 후보가 당선이 되면 대체복무제가 시작도 하기 전에 좌초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을 텐데 말로 꺼내면 실제로 그리 될까 봐 마음속으로만 불안을 꾹꾹 눌러 담았다.


예상대로 연말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었다. 나는 가석방 기간이라서 투표권이 없어서 투표를 못했지만(지금은 가석방자들과 실형 1년 미만의 재소자는 투표할 수 있다) 내가 투표했더라도 이명박의 당선을 막을 수는 없었다. 2008년 동안 이명박 정부의 병무청은 대체복무제도에 대한 연구 용역사업을 시행했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두루 살펴보고 당시 한국의 상황에 맞는 대체복무제도의 도입을 준비하기 위한 연구였는데, 이명박 정부는 연구 내용 중 병역거부에 대해 부정적으로 나타난 여론조사 결과 하나만 부각하며 대체복무제의 도입은 사회적 합의가 되지 않았으므로 시기상조라며 대체복무제를 백지화했다. 취임하자마자 노무현 지우기에 열심이었던 이명박 정부였기 때문에 대체복무제도 엎어질 거라는 예상을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막대한 세금을 들여서 진행한 연구를 진행하고 보고서의 딱 한 줄을 가지고 나와 정부가 약속한 정책을 뒤엎는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200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날이었다. 가석방 출소 선물이 최악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돌아왔다.

      

충격은 생각보다 크고 오래갔다. 처음부터 없던 것은 기대도 상실감도 없다. 하지만 잠깐 가졌다가 없어지거나 거의 다 손에 잡았다가 놓친 것은 처음부터 없던 것보다 더 아프고 상실감도 더 크다. 대체복무 시행 문턱까지 갔다가 후퇴하고 나니 활동가들은 모두 이제 무엇을 더 해야 할지 몰랐다. 그동안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다. 청와대와 국방부를 압박하고 설득했고,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을 모아 대체복무 법안을 꾸준히 발의하고 토론회를 하면서 입법의 필요성을 알렸다. 병역거부자들이 꾸준히 등장하면서 재판을 받고 헌법재판소에 병역법 위헌 소송도 냈고, 유엔 자유권규약 위원회의 개인통보제도에 진정하고 다양한 유엔 메커니즘을 통해서 한국 정부를 압박해왔다. 해야 하는 것은 다 하고 할 수 있는 것들도 모조리 다했다. 깊은 좌절감 속에 앞으로 무엇을 더 해야 할지, 아무런 계획도 세울 수 없었다.

       

물론 전쟁없는세상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새롭게 시작한 무기 거래 감시 운동으로 확산탄 관련 활동을 활발히 이어갔고 이제 막 불타오르려 하고 있는 강정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에 열심히 동참했지만 병역거부 운동은 새로운 동력이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 병역거부자는 꾸준히 등장했고 그때마다 기자회견도 하고 1인 시위도 하고 병역거부자가 감옥에 가면 수감자 지원 활동도 했지만 우리의 활동이 사회의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기대는 사라져 버렸다. 대체복무제 도입에서 넘어져버린 활동가들은 점점 지쳐갈 수밖에 없었다. 서로에게 서운하거나 미안한 감정만 쌓이고, 이는 병역거부 운동 전체의 무력감으로 이어졌다.

     

좌절감을 떨치기 위해 자극이나 계기가 필요했다. 우리의 고민을 전해 들은 외국의 평화활동가들이 비폭력 트레이닝이란 것을 제안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전쟁저항자 인터내셔널(War Resisters’ International)에서 활동하며 한국 병역거부 운동에 초창기부터 연대했던 안드레아스 스펙이 트레이너로 한국을 방문해 비폭력 트레이닝을 진행했다. ‘운동의 설계도(Movement Action Plan)’이라는 프로그램이었데 빌 모이어라는 사람이 사회운동들을 분석해서 만든 툴이었다. 사회운동이 최종 성공까지 가는 동안 거쳐야 하는 단계들을 구분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필요한 전략이 무엇인지를 찾는 방식이었다. 참가자들은 가장 먼저 자신들의 캠페인이 1~8단계 중 몇 단계에 위치해 있는지를 토론을 통해 찾아야 했다.


병역거부 운동 10년을 돌아보고, 현재(당시 2012년)를 진단하며, 다가올 10년을 계획했던 비폭력 트레이닝

     

시작부터 우리는 당황했다. 전쟁없는세상 안팎의 서른 명 정도 되는 활동가들이 참여했는데, 전쟁없는세상의 병역거부 운동이 몇 단계인지 진단한 결과가 서로 너무 달랐다. 어떤 이는 아직 걸음마 단계인 2단계로 생각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성공을 목전에 둔 7단계로 판단했다. 2단계와 7단계 사이에도 여러 의견이 분포하고 있었다. 이 결과는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누군가는 전쟁없는세상의 목표를 대체복무제 도입에 두었고, 또 다른 이들은 대체복무제는 지나가는 단계로만 여겼던 것이다. 서로가 생각하는 운동의 목표가 달랐고, 현재 상황에 대한 진단도 달랐는데 우리는 그걸 모른 채 활동해왔으니 우리가 성공할 수 없었구나 싶었다.

      

안드레아스 스펙의 진행에 따라 우리는 먼저 병역거부 운동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토론했고 당시 한국 병역거부 운동이 목표를 달성해 가는 어느 길목에 있는지를 토론했다. 서로의 인식이 다른 지점에서 안드레아스는 적절한 질문을 던져줬고, 우리는 그 질문에서 시작해 토론하여 합의된 결과를 도출해갔다. 병역거부 운동의 위치를 확인한 뒤에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함께 찾아보았고, 사회운동에 필요한 여러 역할을 살피며 각자가 어떤 방식으로 병역거부 운동에 동참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좌절감을 극복하기 위한 무슨 치트키 같은 대단한 방법을 가르쳐준다거나 묘수를 깨우치게 해 준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것이 사회운동에 존재할 리도 없다. 대신 트레이닝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문제점을 찾을 수 있었고, 그걸 해결해 나갈 방안을 모색할 수 있었다. 운동의 설계도를 통해서 병역거부 운동의 위치를 확인한 것도 중요한 성과였지만, 실은 위치를 찾아가는 과정이 더욱 값졌다. 트레이닝에 참여한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며 합의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다른 어려움이나 좌절 또한 함께 극복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또한 그 과정을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경험한 것도 값진 일이었다. 서로의 처지와 상황 역할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법을 배웠고, 모두가 책임감을 갖고 자신의 역할을 찾는 법을 익혔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필연적으로 동료들에 대한 신뢰도 두둑해졌다. 그리고 쉽게 지치지 않는 방법도 찾았다. 사회운동은 사회변화에서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그렇지만 그 과정은 무척 지난하고 저절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활동가들의 어떤 노력이 사회 변화에 어떤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래 걸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조급할 필요가 없었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으니 우왕좌왕할 필요도 없었다.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우리는 우리의 계획을 가지고 우리가 바라는 사회 변화를 향해 걸어가기로 했다. 예전보다는 조금 더 영리하게, 조금 더 여유 있게 걷는 법을 함께 찾아가면서.


                               



비폭력 트레이닝을 받고 좌절을 극복한 전쟁없는세상은 사회운동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캠페인을 성공하기 위해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국내에서도 이를 촉진하는 비폭력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현재 전쟁없는세상 비폭력팀의 시작입니다. 비폭력 트레이닝 문의는 전쟁없는세상으로 하시면 됩니다. 


비폭력 트레이닝이 궁금하시다면 아래 링크들을 참고하세요. 


전쟁없는세상 비폭력 프로그램 소개

비폭력 트레이닝 자료들

<어떻게 세상을 바꿀까> 온라인 가이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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