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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Apr 19. 2021

괴물

짧은 리뷰

스포일러 있음 


평화활동가가 이런 말 하면 좀 이상하지만 언제부턴가 드라마에 범죄, 살인사건, 미제사건 이런 거 없음 재미가 없다. 동백꽃 필 무렵도 나에겐 멜로물이 아니라 까불이를 찾는 장르물이어서 재밌었다. 시그널, 비밀의 숲 시즌1,2, 라이프 온 마스까지 가장 재밌게 본 드라마들은 모두 범죄 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을 찾는 범죄물이었다. 


그래서 드라마 괴물이 넷플릭스에 올라오길 무척 기대하고 기다렸다. 누군가는 이 드라마를 비밀의 숲에 비교하던데 나는 두 드라마가 경찰이 등장해서 사건을 해결해간다는 것 말고는 닮은 점이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처음에는 제목 때문에 드라마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문제의식과 닿아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관통하는 김요한(김상경) 대사 "괴물은 태어나는 것일까, 만들어지는 것일까?"처럼 누가, 왜 괴물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드라마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괴물은 괴물이 어떤 존재이고 왜 태어나는지를 설명하는데 힘을 쏟기보다는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은 어느 정도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자책감, 죄책감, 상실감, 미안함 같은 것들의 최대치는 과연 얼마일까?


괴물의 등장인물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고통을 감당하려고 발버둥 치는 이들과 고통을 외면하는 이들. 고통을 외면하는 이들은 20년 전 사건을 일으키고 은폐한 한기환 경찰청 차장, 도해원 문주시 시의원, 이창진 JL건설 대표다. 그리고 그 대척점에 20년 전 사건의 진실을 찾으려 애쓰는 만양파출소와 경찰서 소속 경찰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20년 전 과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각자가 만든 고통의 늪에서 허우적댄다. 


만양파출소 경위 이동식은 20년 전 쌍둥이 동생 이유연의 끔찍한 실종과 방선화의 사망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였다. 무고함은 밝혀졌지만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은 여전했고, 이동식은 돌아오지 않는 동생을 기다리며 산다. 살아있을 거라는 기대는 크게 안 하지만 사체라도 찾기를, 그래서 무연고 백골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늘 확인하러 달려간다. 동료들이 또라이라고 부를 정도로 정신줄을 놓고 사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20년 전 사건 때문으로 보인다. 동생이 죽고, 동생을 기다리던 아버지가 객사하고,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쓰러졌다. 이동식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이 모든 일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처럼 자책감 속에서 또라이를 연기하며 살아간다. 


이동식의 절친이자 만영 경찰서 서무과장인 박정제에게는 살아가는 게 지옥이다. 그를 20년 전 술 마신 채 운전을 하다가 손가락이 잘린 채 이미 차에 치어 도로에 누워있는 이유연을 차로 치었다. 원래도 마음이 심약한 데다 이유연과 연인 사이였던 그는 공포와 충격에 사로잡히고 그의 어머니 도해연 시의원(사건 시점에서는 이사장)과 도해연의 사업 파트너 이창진 JL건설 대표가 현장을 정리하고 사건을 은폐한다. 박정제는 큰 충격으로 사건 당일의 기억을 잃어버리지만, 죄책감만은 사라지지 않고 그가 살아가는 내내 그의 일상을 지옥으로 잡아 끈다. 


20년 전 이유연의 실종, 방선화 살해 사건 용의자로 이동식을 체포했던 남상배는 현재는 이동식이 근무하는 만양파출소 소장이다. 남상배는 부족한 증거와 무리한 수사로 이동식에게 범인 낙인을 찍었던 20년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며 살아간다. 의욕이 앞선 한주원에게 경찰의 의욕이 얼마나 무서운 칼이 될 수 있는지를 자신의 경험을 빗대 설명한다. 그를 지배하는 고통은 아마도 이동식에 대한 미안함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동식의 또라이짓을 감싸고 이동식을 보호한다. 


이들은 물론 20년 전 사건의 실체를 찾는 일에도 열심히지만, 나는 그것이 경찰로서의 사명감이라든지 정의감의 발로라기보다는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컨트롤하고자 하는 무의식의 발로처럼 보였다. 자책감, 죄책감, 미안함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다만 그 고통이 자신의 삶을 잡아먹지 않도록 줄이고 싶은 발버둥이지 않았을까. 


이들의 고통이 과거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한주원이 감당해야 할 고통은 진실이라는 현재의 고통이다. 20년 전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면서 자신의 근원이 무너지는 고통. 그 근원은 어떤 혈연관계라기보다는 한주원이 쌓아 올린 세계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한기환의 범행을 알게 된 순간 한주원은 오열하지만 어차피 한기환 차장과 한주원은 서로를 존중하거나 애정하기보다는, 서로가 서로의 삶의 도구 역할을 했었다. 아버지의 몰락보다 한기환으로 상징되는 한주원이 믿어온 세계의 질서가 진실을 마주하는 과정에서 몰락하면서 오는 충격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괴물은 극단적인 사건을 통해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크기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만, 실은 이는 꽤 보편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과연 죄책감, 자책감, 미안함, 부끄러움, 모욕감 같은 고통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멘탈 터프니스가 꽤나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해왔는데 과연 그러할까? 감당하지 못하는 고통을 겪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어느 정도의 고통을 감당할 수 있을까? 드라마를 보는 내내 스스로 되묻게 되었다. 


한국 드라마의 단점이 결말로 다가갈수록 모든 갈등이 해소되어버리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예를 들면 스토브리그의 백승수 단장은 실력은 최고지만 피도 눈물도 없이 효율만을 추구하는 캐릭터여서 매력적이었는데 결말로 갈수록 따뜻한 사람이 되어버려 극이 긴장감이 사라져 버렸다. 괴물 또한 결말로 다가갈수록 그런 면이 두드러진다. 까칠했던 한주원과 또라이였던 이동식이 서로에게 공명하는 관계로 변해간다. 그런데도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동식, 남상배, 박정제 등의 고통이 자연스럽게 사그라드는 순간을 한주원의 고통이 대체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물론 한주원은 너무 슈퍼맨인 게 고통마저도 감당해내고야 마는 것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한주원과 감정적인 또라이 이동식의 구도는 형사물의 익숙하고 전형적인 구도지만, 이동식의 능구렁이짓에 한주원이 말려들어 흥분하는 등 전형을 깨는 재미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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