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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un 01. 2021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짧은 리뷰

저자들에 대한 믿음도 있었지만 정확히는 제목에 낚여서 책을 샀다. 저자를 믿고 목차와 서문을 꼼꼼하게 읽지 않은 탓이다. 도통 유튜브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나이지만, 앞으로는 뭐를 하든 영상 매체의 감각을 익혀야 한다는 것쯤을 알고 있다. 엄기호, 김성우 두 분이 딱히 기술적인 것을 알려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영상이라는 매체를 접할 때 필요한 어떤 인문학적인 접근법 같은 것을 기대했다. 물론 영상 매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지만, 이 책은 전적으로 유튜브(영상 매체)에 대한 책이 아니라 '리터러시'에 대한 책이었다. 부제인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가 제목보다 이 책을 온전하게 설명한다. 기대를 배신당했지만, 덕분에 생각하지 못한 인사이트를 얻었다. 역시 저자들을 믿고 사길 잘했다.  


저자들은 리터러시가 무엇인지, 왜 중요한지, 어떻게 리터러시를 키워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저자들이 말하는 리터러시를 문장의 뜻과 맥락을 읽어내는 문해력만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보다는 타인의 삶의 무늬를 읽어낼 수 있는 능력에 가깝다. '삶을 위한' 말귀이고, 문해력이고, 리터러시인 셈이다. 사실 아주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타인의 삶을 읽어내는 말귀가 꽉 막혀있는 요즘 시대에는 뻔한 이야기 같아도 이런 이야기들이 소중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사회비평서로 읽어도 충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 책이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리터러시에 대해 깊게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는데, 특히 나는 '병역거부자의 말'과 연관 지어 리터러시를 생각하며 읽었다.   


리터러시는 (사전적인 의미이기도 한) 좁은 의미에서는 문장을 이해하고 구사할 줄 아는 능력이다. 병역거부로 치면, 병역거부자들이 자신의 병역거부 사유를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언어로 설명하는 능력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과거 내가 생각하는 병역거부운동에서 리터러시의 개념은 딱 이 정도였다. 어려운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능력, 그래서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 


텍스트라는 것이 객관적이고 공평한 난이도를 가지고 있고, 훈련을 받으면 모두가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삶과 권력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거죠. 어떤 텍스트로 평가를 하느냐는 권력의 문제예요. 우리 어머니에게는 그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거죠. 내가 원하는 내 삶의 텍스트를 써내고, 읽어내고, 평가받을 수 있는 권력이 없는 거예요.(47쪽)


다른 글에서도 여러 차례 말한 적이 있는데, 양심적 병역거부는 본디 고등교육을 받은 중간계층에게 유리한 실천이다. 추상적인 양심을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언어로 설명해 타인을 설득하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로, 주장을 다듬어 언어를 만드는 연습을 해오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특히 쉽지 않기 때문이다. 리터러시가 계급에 따라 권력의 격차로 이어지는 상황이 병역거부 운동에서도 반복된다. 허나 이 책의 저자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리터러시를 다르게 접근할 것을 제안한다.


제가 학생들에게 잘하는 말인데, 학생들이 개떡같이 이야기해도 가르치는 사람은 찰떡같이 알아듣는 거, 그거야말로 가르치는 자의 윤리입니다. 그런데 권력화 된 방식의 리터러시에서는 반대로 권력자들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을 문해력이 없다고 합니다.(50쪽)


저자들은 리터러시를 습득하는 데 작용하는 권력의 격차뿐만 아니라, 리터러시의 기준되는 관계에 이미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를 병역거부 운동으로 가져와서 생각해보자. 검사를, 대체역 심사위원회의 심사위원들을 설득해야 하는 책임이 병역거부자에게 있는데 판검사와 심사위원들이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읽어낼 수 없다면 지금까지는 병역거부자의 리터러시가 문제였다. 반면 저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는 병역거부자의 말을 판검사와 심사위원들이 못 알아들은 것일 수도 있다. 이럴 경우 병역거부자가 아니라 판검사와 심사위원의 리터러시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병역거부자를 지원하는 활동을 하면서도 한 번도 이렇게 생각해보지 못했다. 나 또한 세상을 설득하고 재판부를 설득할 언어를 갈고닦고 준비해야 한다고 병역거부자들에게 조언했을 뿐이다. 물론 이는 여전히 필요한 조언이라고 생각하지만 병역거부자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의 리터러시를 문제 삼을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리터러시를 논의할 때 중요한 것은, 반드시 책을 읽어야 하느냐 영상을 봐도 되느냐가 아닙니다. 그 무엇을 하든, 이것들을 통해서 타자의 세계에 대한 이해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죠.(173쪽) 


우리가 '삶의 리터러시'라고 말하는 이유도, 삶을 위한 리터러시이기도 해야 하지만 삶을 읽어낼 수 있는 리터러시여야 한다는 뜻이잖아요. 내 삶을 읽기 위해서라도 타자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하고, 타자의 삶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218쪽)


판사와 검사, 심사위원 중 일부가 병역거부자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병역거부자들의 삶을 그들이 이해했다면, 병역거부자의 양심이 어떻게 형성되고 구현되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병역거부자들의 상황과 처지가 다른 만큼 그들의 양심의 내용도, 양심 형성의 시기와 내용도, 양심 발현의 형태도 다르다는 것을 맥락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구체적인 삶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검사들이 병역거부자에게 던진 질문과 판사들의 유죄 판결문과 일부 대체역 심사위원들의 질문은 천편일률적이고 납작하고 엉성한 논리만을 반복한다.  마찬가지로 판사와 검사가, 심사위원이 병역거부자의 실제 삶 속에서 리터러시를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소견서의 한 문장, 과거 행적 가운데 한 자락을 싹둑 잘라내서 쪼개어 따지고 드는 것이 아니라, 병역거부자 개개인이 어떤 구체적인 삶의 궤적을 거치면서 그와 같은 양심이 형성되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이들은 계속 바보 같은 질문만을 반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타인(병역거부자)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결정을 할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다는 점이다. 권력을 가진 이들의 게으름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공동체에 대한 직무유기다. 


실제 삶 속에서 리터러시는 사회적인 관계, 경제적 조건, 정보 접근성, 언어 능력 같은 다양한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는 거죠. 예를 들어 결혼이주여성의 건강 문해력을 보죠. 이들의 건강 문해력을 개인이 갖고 있는 능력으로 환원시켜 이해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위험하기까지 해요. 이주여성 한 사람 한 사람이 건강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갖추었느냐만 본다면 전체 그림을 완전히 놓쳐버리는 것이죠. 이들의 건간 문해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국에서의 체류 기간, 출신 국가, 연령, 동거 가족의 수, 학력 수준, 한국어 유창성 및 주관적으로 느끼는 건강감 등을 함께 살펴야 해요.(266쪽)    


 병역거부자들의 삶의 리터러시를 읽어내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었지만 이는 나 자신을 향하는 비판이기도 하다. 전쟁없는세상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병역거부자를 상담하는 가장 중요한 단체다. 나는 과연 전쟁없는세상을 찾아오는 병역거부자들의 삶을 읽어낼 말귀가, 리터러시가 있나? 물론 전쟁없는세상이 봉사 단체는 아니고, 우리는 명백하게 평화운동의 한 방법으로 병역거부를 사고하고 있다. 모든 병역거부자를 지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와 같은 언어를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내가 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성급하게 판단을 내린 병역거부자들은 없었는지, 되돌아봐야겠다.



덧글


리뷰로 남긴 주제와는 별개로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다음의 두 가지다. 


이해라는 리터러시의 측면에서 본다면, 세계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의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듣고 있는 말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 사람의 의견이고 그 의견은 내 의견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극을 준다는 점을 성찰해낼 수 있거든요. 리터러시 교육이란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어야 하지 않습니까.(249쪽)


소셜 믹싱이라는 게 오프라인에서는 이미 거의 끝난 상태고, 온라인에서는 심지어 자기가 속할 커뮤니티를 만들어 낼 수 있잖아요. 저는 그게 위험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안전할 수는 있겠지만 활동과 성장의 환경이 되지는 못하는 거죠. 기존의 사고틀을 깨는 글을 읽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실천을 모색하고, 새로운 세계로 진입함으로써 성장한다는 가능성이, 균질한 사람들이 모인 그룹 안에서는 봉쇄돼버리는 거예요. 안전한 커뮤니티를 만들어냄으로써 안정성 이외의 다른 것은 다 잃게 되는 거죠.(244쪽)


요즘의 사회운동의 분위기(?)에 대해 고민이 많은데 내 마음을 대변해준 건 같은 구절들이다. 이 이야기는 매우 민감할 수 있는 이슈라서 더 많이 고민하고 언젠가 생각을 정리하는 글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결국 맥락이 중요한데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느 위치에서 쓰느냐가 글이 전하는 메시지의 전부일 수 있다. 과연 나는 이와 관련한 글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에 대한 고민은 오프라인에서 신뢰하는 친구들을 만나면서 계속 나눌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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