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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May 17. 2021

모국어가 없는 세상을 선택하는 이들, 병역거부자 난민

감옥에서 출소하고 난 뒤 전쟁없는세상 친구들과 자전거 여행을 계획했다. 마침 도쿄에서 열리는 어느 행사에서 전쟁없는세상을 초대했고, 우리는 행사에도 참여할 겸 일본 자전거 여행을 가기로 했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오사카로 들어갔고, 오사카에서 도쿄까지 약 1000km를 자전거로 가는 계획이었다. 결국 해발 1000미터가 넘는 하코네를 앞두고 후지시에서 기차에 자전거를 실었지만, 그래도 1000km 중 700Km 정도는 자전거로 이동했다. 아직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종이 지도책을 사서 길을 찾았고 지도에 나오지 않은 조그만 길은 현지인들에게 물어물어 다녔다. 우리 중에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니 도로표지판을 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히라가나 가타카나가 아니라 한자가 나오면 그조차도 반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일본은 그래도 기후나 음식이 익숙한 편이었지만, 모국어가 없는 세상에 대한 감각은 깊게 각인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익숙하고 당연한 것들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감각이었다. 두려움이기도 하고, 고립감이기도 한 감각. 그 여행에서 나는 모국어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이란 어떤 일일까를 생각했지만 제대로 상상할 수는 없었다. 좀처럼 떠올려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국가주의에 대해서 비판하는 입장이면서도 우리는 국적의 바깥을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그랬으니 병역거부를 사유로 난민을 신청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종교를 바꾸고, 야구 응원팀을 바꾸는 것도 어렵지만 국적을 바꾸는 일은 훨씬 더 어렵게 느껴졌고, 모국어가 없는 세상이 모국어로 소통하는 감옥보다 더 두려웠으니까. 베트남 전쟁 중에 탈영을 하고 제3국으로 망명한 미군과 그 미군들을 도운 일본 평화활동가들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내게 그것은 현역 군인의 선택적 병역거부라는 의미가 강했다. ‘망명’, ‘난민’ 같은 단어는 머리에서 겉돌다 이내 사라지고는 했다. 그러던 차에 병역거부를 사유로 캐나다로 망명한 김경한 님의 소식을 접했다. 병역거부를 이유로 캐나다로 망명한 김경한 님의 사례는  오태양의 병역거부를 보며 군대를 거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받았던 충격만큼이나 강렬했다.   

    

병역거부자 난민에 대한 충격과 감각이 더 구체적으로 다가온 것은 김경한 님의 망명 소식 몇 해 후 프랑스에서 들려온 이예다 님의 이야기였다. 김경한 님의 또한 평화주의가 병역거부 난민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언론의 짤막한 보도만으로는 알 수 없다. 반면 이예다는 아주 구체적으로 평화주의자인 자신이 병역거부 난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불교를 배우며 모든 생명을 죽이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이 생각이 병역거부로 이어졌다. 그에게 난민이라는 선택지를 가르쳐준 것은 함께 병역거부를 고민하던 친구였다고 한다. 그에게 ‘병역거부자 난민’이라는 정체성은 스스로의 삶의 원칙을 지키는 개인적인 실천일 뿐만 아니라, 전쟁과 군사주의에 저항하고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는 시민불복종이었다.

      

군대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방식으로 난민의 삶을 택할 수 있다는 것은 내 상상의 영역 밖에 있었다. 한국에서 병역거부를 하고 감옥에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예다는 난민을 택했다. 왜 감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난민이 되는 것을 선택했을까? 2021년 병역거부의 날 온라인 행사에 패널로 참여한 이예다는 “한국을 떠난 것을 실감한 순간이 있었냐”는 질문에, 프랑스 사회도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고 힘든 것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동떨어져 있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고 대답했다. 한국에서도 비주류, 비국민의 삶을 살아가던 그에게 난민은 낯설지 않은 정체성이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난민 지위를 획득한 이예다 님. 이예다 님은 평화주의 신념만으로 인정받아 난민 심사를 통과한 첫 번째 병역거부자다.


이예다의 소식이 알려진 뒤에 많은 병역거부자들은 난민을 주요한 선택지에 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전쟁없는세상에 상담 요청을 해오는 병역거부자들도 과거에는 재판 절차나 수감 생활에 대한 것을 물어왔는데, 이예다 이후에는 난민 신청에 대한 문의가 급증했다. 난민을 선택지로 고민하는 병역거부자들은 확실히 이전의 병역거부자들과 한국 사회에서 처지가 달랐고 국가나 한국 사회에 대한 감각이 달랐다. 병역거부 난민을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준비하는 이들과 만나면서 나는 두 가지 면에서 놀랐다.    

   

첫 번째는 ‘난민’에 대해 나의 무지가 너무 심각했다는 것이다. 난민이라고 했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매우 전형적이었다. 전쟁이나 심각한 기아를 피해 고향을 떠난 이들, 파리에서 택시운전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홍세화 선생님처럼 독재정권과 맞서다가 사실상 추방당한 정치적 망명자들이 난민의 모습이었다. 헌데 한국의 병역거부자들은 전과자가 되어 일정 정도 사회적 차별을 받긴 하지만 그것이 전쟁터를 도망쳐 온 난민들처럼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고, 군사독재 정권에게 쫓겼던 정치범처럼 한국으로 송환되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상황은 아니었다. 병역거부자들이 한국에서 양심의 자유를 침해당하고 있고 이는 엄연한 인권침해지만, 어쨌든 현실에서는 한국의 병역거부자들보다 더 열악한 처지에 놓인 난민들이 많이 있을 거였고 나는 고통의 크기로 난민을 심사하는 재판관 마냥 난민의 자격을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나와(혹은 앞선 병역거부자들과) 난민이 되는 것을 고민하는 새로운 병역거부자들 사이의 한국사회에 대한 감각 차이 때문이었다. 평화운동을 비롯해 사회운동 활동가들은 입만 열면 정부의 잘못과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판한다. 까칠하다거나 왜 그리 불만만 가득하냐는 지청구를 주변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듣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 나라가 아무리 헬조선이라고 해도 나는 이곳을 영영 떠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이 나라가, 이 사회가 만족스러워서가 아니라 모국어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은 다 조금씩은 모순과 문제가 있으니, 지금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해 사회를 고쳐나가는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이예다 이후 병역거부 난민을 준비하는 분들은 생각 자체가 달랐다. 꼭 한국에 살아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고, 스스로 한국 사회에 속해있다고 여기지 않는 분들도 많았다. 이미 이 사회 안에서 비주류이고 비국민이기 때문에 여기를 떠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이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내와 예전 병역거부자들이 갖고 있는 권력을 새삼 돌아보게 되었다. 병역거부자들이 대단한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며 우리 중에 당연하게도 성소수자도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 신체 건강한 비장애인 좋은 학벌의 남성이었다. 병역거부자가 되면서 비주류, 비국민이 되는 감각을 처음으로 경험해 볼 정도로 나는 이 사회에서 불편함이 크게 없었던 것이다.      


병역거부 난민을 고민하는 분들과의 만남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다짜고짜 메일을 보내 자신이 누구인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난민 신청에 필요한 자료를 다 보내라고 요구하거나 외국 공항이라면서 해당 국가의 인권단체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들은 차라리 양반이었다. 외국으로 나갈 비행기 티켓을 전쟁없는세상 더러 사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으니.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 사회의 군사주의를 극복하는 것에 관심이 없는 분들도 많았고 자신의 난민 신청에만 몰두한 나머지 전쟁없는세상을 무슨 서비스센터쯤으로 여기는 분들도 있었다. 물론 진지하게 고민하고 도움을 요청해오는 분들도 많았고 이예다처럼 자신의 난민 신청이 한국사회의 변화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분들도 있었다. 이들 덕분에 병역거부의 의미가 확장되었고, 과거에는 병역거부를 고려하지 않았을 분들이 병역거부를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병역거부를 사유로 타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례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드물다. 그나마도 대부분이 성소수자이기도 한데,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이 겪는 차별이 난민으로 인정받는 게 크게 작용했다. 반면 평화주의 신념만으로 난민으로 인정받은 이는 이예다가 유일하다. 대체복무제가 도입된 이후에는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외국에서 병역거부를 사유로 난민으로 인정받기는 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또 다른 병역거부 난민을 마주하고 있다. 전쟁을 피해서 한국으로 떠나온 병역거부 난민이 그들이다. 더러는 징집을 피해, 더러는 징집된 이후 탈영하여 한국에 도착해 난민 신청을 했다. 그들이 떠나 온 나라의 전쟁터에선 한국산 무기가 발견되었다. 그들을 난민으로 내몬 책임에서 한국 정부가 자유롭지 않고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은 병역거부의 권리를 보호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한국 정부는 단 한 명의 병역거부자도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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