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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Oct 10. 2021

덕수궁 프로젝트 2021: 상상의 정원

짧은 리뷰


덕수궁


서울에 있는 다섯 개의 궁궐(경복궁, 창경궁, 창덕궁, 운현궁, 덕수궁) 중 덕수궁은 나머지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경복궁의 웅장함이나 창덕궁의 포근함이 조선의 모습이라면, 덕수궁은 처연하게 비극적인 느낌과 활기찬 느낌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덕수궁에 새겨진 역사 때문이지 않을까. 덕수궁에는 한국 근대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일본의 영향력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되돌아온 궁궐이 덕수궁이었다. 일개 대사관으로 피신했던 몰락한 전통 왕조의 마지막 왕의 비참함을 덕수궁은 기억하고 있다. 동시에, 새로운 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오는 시기의 궁궐이었던 덕에 다른 궁궐과는 달리 서양식 건물과 정원을 갖게 되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쓰고 있는 석조전이 그 주인공이다. 나무로 만든 건물과 돌로 만든 건물이 공존하는 풍경은 덕수궁만의 매력이다. 그 매력은 모던하면서도 고풍스럽고 비극적이면서도 활기찬 모습이다. 오직 덕수궁만이 이런 느낌을 줄 수 있다.



정원


정원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굉장한 부자가 아닌 이상에야 누릴 수 없는 사치가 되어버렸다. 나 어릴 적만 해도 정원이라고 거창하게 부를 순 없지만, 주택 앞마당에 조그만 화단이나 텃밭 혹은 나무 몇 그루라도 심어져 집주인이 돌보는 식물들의 공간이 있었다. 각각의 정원은 식물이 주인이라는 점에서는 닮았지만 정원을 돌보는 사람의 취향과 손길에 따라 저마다의 개성을 뽐냈다. 이제 이런 사적인 정원을 만나기는 힘들다. 대신 도시 곳곳에 공원이 생겼다. 공원은 꽃밭보다는 조경수 중심이라 아쉽지만, 이나마도 어디냐 싶다. 사적이든 공적이든 정원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숲과는 또 다른 매력을 품고 있다. 숲은 웅숭하고 신비로운(때로는 두려운) 반면 정원은 조형미와 더불어 사람의 손길이 지는 온기를 가진다. 정원에는 그곳을 돌보고 가꾸며 함께 살아간 사람의 흔적이 남기 때문이다. 잘 가꾸어진 정원은 식물의 공간인 동시에 인간적인 공간이며,  인간의 공간이지만 인위적이기보다는 자연적인 공간인 셈이다.


그러고 보면 덕수궁과 정원   서로 상반된  가지의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비극적이면서 활기찬 궁궐과, 자연적이면서 인위적인 공간으로서 정원.  엇갈리는 조화가 '덕수궁 프로젝트 2021: 상상의 정원' 전시에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상상의 정원, 그리고 면면상처


상상의 정원 전시는 모두 10명의 작가(권혜원, 운석남, 지니서, 김명범, 황수로, 김아연, 이예승, 성종상X이용배, 신혜우)가 참여해 10개의 작품(이예승 작가만 두 작품)을 선보인다. 영상, 그림, 설치미술, 애니메이션, 증강현실 등 다양한 장르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덕수궁의 정원을 키워드로 이토록 다양한 접근과 예술적 재현이 가능하다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권혜원 작가의 '나무를 상상하는 방법'이 첫 번째 작품인데 이 작품부터 순서대로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 작품은 우리는 덕수궁의 정원으로 초대하는 길잡이 같은 전시다. 나무의 시선을 가지고 나무의 마음이 되어볼 준비를 시켜준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각각의 독특한 작품들이 이어진다. 황수로 작가의 '홍도화와' 김아연 작가의 '가든카펫'은 아름다웠고, 김명범 작가의 '원'은 신비로웠고, 이예승 작가의 '구곡소요'는 신기하고 재밌었다.


김명범 작가의 '원'
이예승 작가의 '그림자 정원: 흐리게 중첩된 경물'과 증강현실을 활용한 '구곡소요'. 사진제공: 최하늬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는 작품은 식물학자이자 식물화가인 신혜우의 전시였다. 작품이라고 하지 않고 전시라고 한 까닭은 전시된 식물세밀화와 채집표본의 종 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단독 전시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만큼 주제의식이 잘 드러나있기 때문이다. '면면상처(面面相處 아무 말도 없이 서로 얼굴만 바라보다)'라 이름 붙인 신혜우의 전시는 그 이름만큼이나 그윽하고 사려 깊다. 신혜우는 덕수궁 정원에서 채집한 식물의 표본과 세밀화를 전시하는 동시에, 식물에 새겨진 인간의 역사를 반추한다. 그림은 아름답고, 투명한 유리 사이에 껴 있는 채집본은 숭고하며, 덧붙여진 신혜우 작가의 설명은 우리의 발걸음과 마음을 오랫동안 붙들어둔다. 조선의 전통 궁궐에 이식된 서양의 건축 양식처럼 덕수궁 정원에는 토종식물부터 외래종이 다양하게 더부살이하고 있다. '면면상처'는 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본 식물의 역사인 동시에 식물의 시선으로 바라본 인간의 역사, 즉 덕수궁 정원의 역사라는 특징을 보여준다. 정원의 역사를 보여주는 동시에 역사의 정원을 보여주는 전체 전시 '덕수궁 프로젝트 2021: 상상의 정원'의 문제의식을 가장 밀도 있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10점의 작품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신혜우 작가의 '면면상처'에 전시되어 있는 식물 채집 표본. 사진제공: 최하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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