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책에 들어가는 내용을 모두 저자가 생산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뒤표지나 띠지에 들어가는 홍보성 문장이나 책의 제목까지도 다 저자가 정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편집자의 역할이 지대하다. 책마다 다르겠지만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저자는 본문 텍스트를 쓰고, 편집자는 책을 만든다. 《병역거부의 질문들》만 보더라도 본문의 구성은 내가 했지만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사진을 모아놓은 '질문하는 순간들'은 편집자 선생님께서 구성하셨다. 특히 프롤로그는 초안을 아예 정리해서 주셨으니 함께 썼다고 하는 게 맞겠다.
이처럼 한 권의 책에서 편집자의 역할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데, 특히 표지를 만들 때는 더 그렇다. 저자와 편집자가 상의해서 만들지만, 굳이 따지자면 표지에는 편집자의 노고가 저자의 노고보다 더 많이 들어가 있다. 책이 나오기 전에 결정해야 하는 표지 요소들은 제목, 표지 디자인, 뒤표지 구성 등등이다. 이러한 요소들에 대해《병역거부의 질문들》표지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제목 짓기는 내가 편집자로 일할 때 가장 어려워한 일이다. 아마 많은 편집자들이 그러할 것이다. 책의 제목을 저자가 짓는 경우도 있지만 편집자가 짓는 경우가 더 많다. 김훈 작가가 가져온 《광화문 그 사아니》라는 원고의 제목을 《칼의 노래》로 바꾼 것은 편집자였다. 물론 편집자가 혼자 만드는 것은 아니고 여러 의견을 취합해 제목안을 만들고 그중에서 가장 적당한 제목을 정하게 된다. 그런데 제목 짓기가 어려운 까닭은, 제목에 대한 평가가 실은 결과론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제목 때문에 책이 얼마나 더 잘 팔렸는지 혹은 얼마나 덜 팔렸는지 측정하기 어렵다. 그냥 잘 나가는 책의 제목은 잘 지은 제목이 되는 것이다. 계량화하거나 수치화할 수 없으니 제목을 지을 때도 어렵다.
《병역거부의 질문들》은 비교적 아주 수월하게 제목을 지었다. 출판사와 계약서를 쓸 때는 주로 가제목으로 쓰는데, 이 책은 계약서에 쓰인 가제목이 '병역거부의 질문들'이었다. 보통 제목은 출간 직전에 정하게 되는데, 편집자 선생님과 함께 아무리 머리를 싸매어봐도 이보다 더 좋은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고, 이 제목이 마음에 쏙 들었다. 많은 때는 제목안을 수십 개씩 만들어도 마음에 드는 제목 하나 없는 일도 허다하니,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부제는 편집자 선생님께서 제안해주셨다. '병역거부의 질문들'이 좋은 제목이기는 한데, 이 주제를 잘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좀 친절하지 않으니 책의 주장을 담고 있는 부제를 붙이면 좋겠다고 하셨다. 같이 부제를 고민해보기로 했는데, 편집자 선생님께서 '군대도, 전쟁도 당연하지 않다'는 부제를 제안해주셨다. 책의 주장을 잘 담고 있는 데다 "당연하지 않다"는 표현이 스스로 단호하면서도 타인을 윽박지르는 느낌이 아니라 좋았다. 그렇게 제목과 부제가 결정되었다.
표지는 보통 제목을 지은 뒤에 만든다. 제목의 느낌을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표지 정하는 일 또한 제목 짓는 일만큼 힘들다. 내가 많은 대표들과 일을 한 건 아니지만, 내가 만난 대표들 가운데 가장 좋은 대표는 현실문화 김수기 대표님이었다. 진보입네 허세 부리지 않고, 편집자들의 기획 자율성을 보장해주면서, 실패에 대한 책임을 노동자에게 돌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표지를 정할 때만큼은 가장 어려운 대표였다. "대중적이면서도 전위적인 디자인"이 나오기를 바랐다!!! 잘 나가는 작가의 책이라면 그림이나 사진을 따로 발주한다거나 후가공을 하는 등 돈 들여서 이것저것 해볼 수 있지만, 많이 팔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책은 표지에 돈을 쓰기도 난감했다. 그럴 경우엔 정말 표지 만드는 게 곤욕이다.
《병역거부의 질문들》오월의봄 출판사에서 내는 문고판 '오봄문고' 시리즈로 출간되는데, 오봄문고 앞선 책들이 대체로 표지가 예뻤기 때문에 나 또한 은근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병역거부라는 주제가 이미지화하기가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병역거부 관련 책들의 표지는 너무 전형적이거나 아주 추상적인 경우가 많은데, 두 경우 다 좋은 표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뭐라 할 수도 없는 게 그만큼 이미지로 병역거부-특히 전쟁없는세상이 생각하는 병역거부의 가치를 구현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편집자 선생님과 표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너무 전형적인 이미지는 피하자고 했다. 비둘기라든지, 철조망이라든지. 그러면서 두 가지의 이미지를 소개했다. 하나는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의 로고인 브로큰 라이플, 그리고 전쟁없는세상이 예전에 거리 캠페인 때 입곤 했던 피스복이었다. 피스복은 군복에 알록달록한 색깔을 칠한 것으로 우리는 그것은 군사주의에 대한 전복의 이미지로 활용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시안이 왔다. 보통은 2~3개의 시안을 저자에게 보여주는데 그 경우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만들어본 시안은 족히 2배수인 4~6개에 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병역거부의 질문들》의 경우는 편집자 선생님이 딱 한 장의 시안을 보여주셨고 그것이 그대로 표지가 됐다! 부러진 총 대신에 부서지는 총이, 핑크색 카모폴라주(국방무늬) 위에 있었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미지는 아니지만 전쟁없는세상은 많이 써온 이미지들로 자칫 뻔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이미지인데, 이걸 레고로 만드니 느낌이 완전히 색달랐다. 표지 시안이 여러 개일 필요가 전혀 없었다! 나중에 편집자 선생님께 여쭤보니 디자이너에게 받은 시안이 이거 하나였다고 한다. 편집자 선생님 또한 나처럼 더 이상의 시안이 필요 없다는 것을 보는 순간 깨달았던 것이다. 이렇게 쉽게 표지가 나오다니, 디자이너 선생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뒤표지야 말로 온전히 편집자가 구성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은 추천사가 들어가지만, 홍보 문구가 들어가기도 하고, 본문의 한 구절을 미리 보여주기도 한다. '오봄문고'의 경우 주로 본문 구절을 보여주는 구성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내 책도 그렇게 하겠거니 짐작했다.
그런데 편집자 선생님께서 추천사는 생각해보셨냐고 물었다. 사실 추천사의 경우 출판사에서 별도의 비용이 발생하니, 저자가 추천사 받고 싶다고 무조건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먼저 제안해주시니 옳다구나 싶어서 바로 이야기했다 "김초엽 작가님이요!" 그때만 하더라도 친분은커녕 일면식도 없는 김초엽 작가님이 추천사를 써주신다는 보장이 없으니 나는 바로 전쟁없는세상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 주는 훌륭한 선생님들 중에 추천사를 쓰기 적당한 분들을 몇 명 말씀드렸다. 편집자 선생님은 그중에 홍세화 선생님께 받자고, 그러고 김초엽 작가도 시도해보자고 하셨다. 홍세화 선생님은 전쟁없는세상을 만들 때 후원회장을 맡아주셨고, 《저항하는 평화》를 낼 때도 아주 긴 추천의 글을 써주셨다. 진중하고 묵직한 문장을 써주실 것이 틀림없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김초엽 작가에게 추천사를 의뢰한 것은 절반(사실 절반 이상)은 나의 팬심 때문이었지만, 절반(당연하게 절반 이하)은 김초엽 작가님이 사회운동에 호의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이보그가 되다》를 인상 깊게 읽으며 그런 느낌을 받았고, 물론 평화운동이나 병역거부 운동은 생소하시겠지만 편견이나 거부감 없이 판단해주실 거라 생각했다. 아, 솔직히 말하면 정말 팬심 가득한 부탁이었다. 난, 성덕이 되고 싶었다.
내가 홍세화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고, 편집자 선생님이 김초엽 작가님게 연락을 드렸다. 홍세화 선생님께서는 흔쾌히 승낙해주셨고, 김초엽 작가님도 답장을 주셨다. 답장의 내용을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 답장에서 한 문장에 너무 기뻤다. 올해 새로 나와야 할 책이 3권이라고. (《방금 떠나온 세계》와《행성어 서점》이 나왔으니 한 권 더 남았다! ) 내 책이 나오는 것보다, 김초엽 작가님의 책을 올해 세 권이나 더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했다. 실은 2021년 하반기는 내게 심적으로 힘든 시기였는데, 그런 나를 위한 선물로만 느껴졌다. 팬레터가 아니니 이쯤에서 다시 《병역거부의 질문들》로 돌아오자면, 결국 나와 편집자 선생님이 함께 계획한 대로 홍세화 선생님과 김초엽 작가님께 추천사를 받을 수 있었다. 젠더, 나이, 전공(?)에 있어서 사뭇 다른 두 분에게 받으니 역시나 해주시는 이야기도 달랐고, 덕분에 책이 더 풍성해진 느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회의(懷疑)하면서 전진하는 이들, 평화를 향한 갈망과 의심을 동시에 품은 이들에게 권하셨으니, 다들 꼭 책을 사보 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