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잔뜩 있음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주인공 순양가 사람들을 보면 사이코패스 같다. 자신에게 대드는 사람들은 그게 형제든 자식이든 절대로 봐주지 않는다는 진양철(이성민) 회장을 필두로 경영권 승계를 위해서라면 형제고 남매고 다 상관없이 온갖 권모술수를 펼치며 저녁식사 자리에서만 부드러운 미소를 띤 순양가의 2세들, 그리고 파탄난 성격을 주체 못 하고 감추지 못하는 재벌 3세 진성준. 그리고 진회장과 각을 세우고는 있지만 복수밖에 눈에 안 보이는 진도준(송중기)까지. 자신의 목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 뿐 타인의 삶이나 사회 정의, 공동체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서민영(신현빈)은 다르다. 드라마가 더 진행되어야 정확하게 할 수 있겠지만 정리해고에 주가조작에 어마어마한 범죄와 협잡을 서슴없이 해내는 이들 사이에서 나름 정의로움을 담당하는 캐릭터가 서민영으로 보인다. 현재의 서민영은 순양가의 저승사자로 불리는 재벌 저격수 검사고 대학시절 서민영은 명문가 자제들의 사교모임 따위 "졸업하고 사회 나가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아쉬울 때마다 서로 뒤봐주는" "잠재적 범죄집단"이자 "단단한 특권"이라는 비판을 서슴지 않으니.
그런 서민영에게 진도준은 착각하지 마라며 "좋은 머리로 니가 노력해서 얻은 시험점수로 당당하게 들어간 대한민국 최고 학부"같냐며 "대를 이은 법조계 명문가인 너희 집안, 건강한 몸, 좋은 머리 그 모든 게 태어날 때부터 너에게 공짜로 주어진 특권"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틀린 말은 아니니 서민영은 제대로 대꾸하지 못한다. 그 뒤 서민영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이 가진 특권에 의존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러다가 카페에서 일을 하며 우연히 카페에 들어온 진도준을 만나서 이렇게 말한다.
"누구 말대로 특권층으로 살긴 싫어져서요. 법조인이 되기 전에 깨닫게 해 줘서 고맙다는 생각도 들고"
서민영에게는 법조인이 되는 미래는 의심할 여지없이 너무 당연한 거였고, 어떤 법조인이 되느냐가 그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특권을 누리지 않는 정의로운 법조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선량한 사람, 극 중에서 가장 상식적이고,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캐릭터의 한치 의심도 없는 자기 미래에 대한 확신이 놀라웠지만 나는 이내 현실의 몇몇 사람들이 떠올랐다. 서민영처럼 이성적이고 똑똑하고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그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존재나 삶이 사회의 정상궤도를 벗어날 수 있다는 상상을 해보지 않은 것처럼 말하던 이들.
이들이 때로는 재수 없을 때도 있다. 예를 들자면 고립되고 소외된 처지에서 거대한 구조와 싸우며 악다구니밖에 안 남은 이들을 향해 천진난만하게 제도와 절차를 이야기할 때가 그렇다. 그런 경우조차도 그들의 말은 얼마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신중하며 심지어 정의로운가. 인간에 대한 믿음, 사회 진보에 대한 열망, 타인에 대한 존중 중요한 것 어느 하나 빠져 있지 않지만, 단 한 가지 빠져 있는 것은 주류의 삶에서 벗어나 본 경험이다. 탄압받을지언정 한 번도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거나 의미 없게 여겨진 적 없는 삶의 궤적.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낙오자가 되거나 소수자가 될 일을 상상조차 하지 않은 그 자연스러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성찰적이고 겸손한 그들조차도 그것이 특권이고 권력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런 이들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운동을 하다 보면 서민영 검사 같은 사람들은 많은 경우 우리의 지지자고 연대자다.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에 기꺼이 후원금을 내고, 행동에 동참하고,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다. 자기 직업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며 그것이 사회 공동체 전체를 위한 일이 되기를 희망하기도 한다. 나는 이들이 위선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들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이들을 볼 때면 건널 수 없는 강, 혹은 서로 닿을 수 없는 낭떠러지 같은 것을 감각적으로 느끼고는 한다. 불편함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어떤 이질감.
그리고 이런 이질감이 점점 옅어지는 건 아닌지 두려움이 인다. 합리성, 논리, 설득력 같은 말은 요즘 내가 많이 쓰는 말이기도 하다. 옳은 이야기를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득하고 이해시킬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피해자라고 우기는 억울한 사람들의 세상에서는 약자의 악다구니를 가장한 강자들의 투정이 넘쳐난다. 착한 사람들의 마음을 악용하는 이런 약자 코스프레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진영논리에 빠지지 않고 합리성, 논리, 설득력 같은 것들을 중요하게 여길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세련되지 못한, 설득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거칠기만 하고 따뜻하지 않은 언어나 행동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세련됨, 설득력, 논리, 따뜻한 포용력 같은 것이야 말로 권력을 가진 이들의 도덕인 줄 알면서도.
나는 서민영이 끝까지 정의로운 검사로 남기를 바란다. 수많은 서민영들이 앞으로도 늘 합리적이고, 정의롭고, 이성적이길 바란다. 권력의 편에 서는 사람으로 변한다거나, 우리 편의 큰 잘못은 옹호하면서 상대편의 지엽적인 잘못만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처럼 된다면 너무 안타까운 일이지 않나.
그럼에도 나는, 아직까지 그 착한 사람들에게 이질감이 느껴진다. 그 이질감이 되도록 오래가면 좋겠다. 뛰어난 활동가라면 합리적이고 상식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과학적 사고를 형성하는데 스며들어 있는 특권을 계속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