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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Feb 17. 2023

[옥플릭스] 진지한데, 아니 진지해서 웃긴

드라마 <주몽>,  <연개소문>

요즘은 한국 드라마도 볼만한 것이 참 많다. 특히 장르의 다양성이 풍성해졌다. 작년에 재미있게 본 드라마만 추려봐도 범죄물(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학원물(약한 영웅), 법정물(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나름 멜로+스포츠물(스물다섯 스물하나), 스릴러(작은아씨들), 그리고 굉장히 독특한 멜로물(나의 해방일지)까지. 드라마만 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그야말로 한국 드라마 전성시대다. 예전에는 잘 만든 드라마는 여럿 있었지만 장르가 대체로 멜로물로 한정된 편이었다. 한국 드라마에서는 의사도, 변호사도 죄다 데이트만 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그런데 예외가 있었으니, 대작 사극의 경우 지금보다 과거가 더 황금기였다. 


물론 인기 있던 대작 사극이 죄다 수작은 아니었다. 시청률은 높았지만 만듦새는 형편없던 드라마도 있었다. 사극을 즐겨보지 않는 편이라 인기도 많고 평도 좋았던 대장금이나 허준 같은 드라마도 안 본 나였는데, 만듦새마저 보잘것없던 사극을 두 편이나 봤다. 아니, 눈은 다른 곳을 보고 어쩔 수 없이 소리만 들었으니 두 편을 들었다고 해야 할지도. 아마도 감옥이 아니었다면 결코 보지도 듣지도 않았을 작품이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순간보다 하기 싫은 것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감옥을 감옥답게 만든다. 뭐 꼭 감옥만 그러건 아니겠지만, 감옥에서는 그런 순간들이 굉장히 일상적인 시공간에 포진해 있다. 보고 싶지 않은 드라마를 봐야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독방을 쓴다면 모를까 혼거방에서는 보고 싶지 않아도 모든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봐야 한다. 나 하나 보고 싶지 않다고 다른 모든 이가 좋아하는 걸 못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럴 때면 나는 구석지에서 책을 보곤 했지만,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텔레비전 소리도 보기 싫은데 억지로 본다고 생각하면 굉장히 걸리적거리는 소음이 되어 버린다. 인천구치소에 수감될 무렵 시작했던 대작 사극 두 편이 나에게는 가장 큰 소음이었다.  


MBC가 편성한 주몽과 SBS가 편성한 연개소문이 그 주인공이다. 이 드라마들은 대하드라마답게, 대륙의 동북공정에 맞서는 대작답게 엄청난 스케일(주몽 81부작, 연개소문 100부작)을 자랑했다. 2002년부터 중국이 추진한 동북공정은 한국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동북공정에 맞서 고구려를 다룬 콘텐츠들이 쏟아졌는데 고구려의 시작과 끝인 주몽과 연개소문이 주인공인 작품이 드라마로 제작된 것이다. 당시 KBS에서는 사극의 강자 최수종을 주인공으로 발탁해 발해의 역사를 다룬 대조영을 편성했는데, 인천구치소에서는 사극 3개를 보여주는 건 부담이었는지 주몽연개소문만 틀어줬다. 


드라마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았다. 비좁은 감옥에 갇혀있으니 사람들은 늘 바깥의 이야기에 목말라 있었다. 면회와 편지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텔레비전에 더더욱 매달렸다. 브라운관에서 나오는 프로그램이 무엇인지는 관계없이. 나는, 그래도 면회도 제한 횟수를 꽉 채웠고 편지도 많이 받았으니 텔레비전을 벗 삼지 않아도 됐다.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나오면 텔레비전 앞으로 갔지만 재미없는 프로그램이 나오면 조용히 뒤로 빠졌다. 주몽과 연개소문도 그랬다. 사람들의 등 뒤로 모처럼 펼쳐진 드넓은 공간에서 나는 책을 보거나 편지를 썼다. 물론 텔레비전 소음에 책을 제대로 읽기는 어려웠거, 나는 드라마를 본 것도 아니고 안 본 것도 아닌 것처럼 애매한 시청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꼼꼼하게 본 드라마 내용도 이젠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대충 보고 들은 드라마들이니 무슨 기억이 있겠나 싶지만 기어이 기억에 남아 있는 대사나 장면이 있다.  


"주몽 왕자님 강철검을 만들었습니다." 

 

모팔모 대장의 저 대사는 꽤 자주 코믹한 방식으로 드라마에서 활용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패러디가 쏟아질 정도로 유행어였다. 당시 잘 나가던 청춘 배우인 송일국과 한혜진을 각각 주몽과 소서노로 캐스팅했지만, 역시 기억에 남아 있는 건 모팔모 대장뿐이다. 이건 내가 송일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다. 


다만 주몽이 망작으로 기억되는 까닭은 캐릭터보다는 연출 때문이다. 어쩌면 전반적으로는 연출이 좋았을 수도 있지만(이미 말했듯이 나는 이 드라마를 제대로 보진 않았다) 하필 내가 본 전쟁 장면은 너무 안타까운데 어처구니없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부여군이 고구려를 쳐들어와 고구려군과 싸우는데 양쪽 군인을 합쳐도 사람 숫자가 50명이 채 되질 않았다. 반지의 제왕이나 왕좌의 게임과 같은 전쟁 연출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50명도 되지 않는 보조출연자들이 진지하고 매서운 표정으로 서로 칼을 휘두르지만 좀처럼 쓰러지지 않는다. 아마 한 칼에 한 명씩 쓰러진다면 전투씬 장면이 30초도 못 갔을 것이다. 사극은 원래 제작비가 많이 든다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국가와 국가의 전쟁인데 고작 50명이 수행하도록 한 만듦새라니. 연기자들은 사뭇 진지하게 삶과 죽음의 경계가 나뉘는 전쟁터의 군인과 같은 표정으로 액션에 몰두했지만, 그 진지함을 담아내지 못하는 드라마의 스케일이 오히려 웃음을 자아냈다.


연개소문은 더 심했던 걸로 기억한다. 드라마가 어지간한 미니시리즈 분량만큼 진행되었는데도 온통 수나라 이야기만 계속 됐다. 동북공정에 맞선 국뽕 드라마여도 재미없었을 것인데, 심지어 국뽕 드라마처럼 홍보해 놓고 오히려 수나라 역사 다룬 사극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한참 뒤에는 연개소문이 나오고 고구려 이야기가 나왔겠지만 나는 인천구치소에서 군산교도소로 이감 가면서 뒷부분은 못 봤다. 못 봤어도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군산교도소에서는 다른 드라마 틀어주기를 바랄 정도였다. 실제로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수나라 시트콤이라는 등 연개소문을 비판하는 글들이 넘쳐난다.


정치물도 좋아하고 역사물도 좋아하는 내가 한국 사극을 썩 좋아하지 않은 까닭을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사극이 국가주의나 애국심을 찬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재밌게 봤던 사극이 다모인데 다모는 반란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니 확실히 국가주의나 애국심을 강조하지 않았다. 그나마 최근에 본 사극은 킹덤인데 킹덤 또한 국가주의나 애국심과는 정반대의, 국민을 지키지 않는 국가권력에 대한 이야기다. 결국 나는 사극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국가주의와 애국심을 강조하는 콘텐츠를 싫어할 뿐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알탕 영화도 재밌게 보고 정치적으로 조금 올바르지 않은 작품도 확실한 재미 포인트가 있다면 잘 볼 수 있는데, 내가 유일하게 견디지 못하는 것이 국뽕이나 국가주의 또는 애국심 같은 것들이다. 


국뽕이 하나도 없는, 국가주의나 애국심 강조가 전혀 없고, 이야기도 재밌고 캐릭터도 매력적인 사극 어디 없을까. 



주몽에게 강철검을 건네는 모팔모 대장




감옥에서 본 드라마를 정리해보고 있습니다. 옥플릭스 로고는 이승한 님이 만들어주심.



주몽


연출: 이주환, 김근홍

각본: 최완규, 정형수

출연: 송일국(주몽) 한혜진(소서노), 김승수(대소), 전광열(금와), 이계인(모팔모)

방송국: MBC

방송시기: 2006.05.15.~2007.03.06 




연개소문


연출: 이종한, 주동민

각본: 이환경

출연: 유동근(연개소문), 서인석(당 태종), 김갑수(수 양제), 이계인(계필하력) 

방송국: SBS

방송시기: 2006.07.08.~2007.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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