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여우야 뭐하니>
요즘처럼 드라마가 넘쳐나는 시대에는 드라마를 고르는 기준이 중요하다. 나는 다양한 기준을 두루 살피는데, 데 장르를 보기도 하고 작가를 보기도 한다. 일단 범죄물을 좋아하고, 멜로는 한동안 안 보다가 다시 보는 편이다. 좀비물이나 판타지도 유치하지 않으면 좋아한다. 작가는 막 찾아서 보는 정도는 아니고, 전작을 재밌게 봤다면 다음 작품도 기대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나의 아저씨를 재밌게 본 뒤에 나의 해방일지를 기대에 가득 차 봤다거나 시그널에 푹 빠진 뒤 킹덤에도 푹 빠진 것처럼. 그런 기준 중에서 가장 손쉬운 것이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는 것이다. 물론 손쉬운 만큼 실패도 잦다.
여우야 뭐하니는 배우들 때문에 기대한 드라마였다. 물론 내 이름은 김삼순을 쓴 김도우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도 기대를 갖게 할 만했지만 당시 나는 작가가 누군지는 몰랐다.
고현정은 90년대 최고의 여배우들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였다.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던 최진실, 묵직한 연기로 이미 신인시절부터 큰 배우의 자질을 보인 김희애,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톱스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김혜수, 여명의 눈동자와 서울의 달 같은 굵직한 작품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채시라, 당시 청춘들의 상징과도 같았던 고소영, 혜성같이 등장해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모두 점령학고 홀연히 떠난 심은하. 기라성 같은 배우들 사이에서 나는 그냥 이유도 없이 고현정이 가장 좋았다. 최고 히트작인 모래시계는 보지도 못했는데(당시에는 서울 수도권에서만 SBS를 볼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결혼과 함께 연예계를 은퇴해서 무척 아쉬웠다. (그때 결혼한 사람이 정용진이라는 걸 최근에 알았다!) 그랬다가 이혼과 함께 드라마 봄날로복귀하고 그다음 작품으로 출연한 것이 여우야 뭐하니였다.
남자 주인공인 천정명은 고현정보다 나이도 훨씬 어리고 중량감이나 인지도도 떨어지지만 그래도 당시 내가 관심 가지고 지켜보던 배우였다.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의 새로운 시대를 연 작품 '고양이를 부탁해' 정재은 감독의 신작 '태풍태양'에서 보여준 싱그러운 연기가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고현정과 연기 합이 잘 맞을지는 의심스러웠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배우 둘이 주인공이니 나름 기대를 했는데 다행히 인천구치소에서 틀어주었다.
당시 내가 머물던 기결방(재판이 끝나 실형이 확정된 수감자들이 머무는 방, 대부분 교도소로 이감을 가고 소수는 구치소에 남아서 일을 하게 된다)에서 방분위기를 주도하는 40대 아저씨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조폭이라고 하는데 도무지 조폭처럼 생기지는 않았다. 왜소한 체격에 싸움을 잘할 거 같은 몸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자기 말로는 요즘 조폭은 사업을 하지 싸움을 하지는 않는다고 했는데 뭐 감옥에선 많이들 허풍을 떠니까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사람과 함께 서로 사장님이라 부르면서 방 분위기를 주도한 이는 역곡역 근처에서 냉면집인지 고깃집인지를 하는데 카드빚 때문에 사기죄로 들어왔다고 했다. 내가 시민단체에서 일한다고 하니까 자기도 80년대에 대학 다닐 때 총학생회했다고 하면서 친한 척을 했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민주적인 총학생회가 아니라 학도호국단을 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설프게 사회운동에 대해 아는 척을 하지만 편견만 가득한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그는 시민사회 단체들이 어디서 검은돈 받아서 운영된다고 굳게 믿었는데, 내가 근거를 대라고 하면 자기도 대학 때 학생회 해서 다 안다는 식이었다. 감옥에는 확실히 대학 나온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이 아저씨는 4년제 나왔다며 지식인 행세를 해대며 온갖 것에 품평을 해대는 사람이었다. 뉴스는 물론이고 드라마도 품평의 대상이었다. 이 드라마는 이야기가 개연성이 없다는 둥, 저 캐릭터는 설득력이 없다는 둥. 누구라도 어떤 것에 대해 품평할 수는 있지만, 얄팍한 감상은 대단한 비평인 냥 늘어놓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여우야 뭐하니를 보면서도 품평은 이어졌다. 사실 고현정과 천정명 때문에 기대했지만 드라마 자체는 재미가 없었다. 결혼 적령기를 지난 삼류잡지 기자(고현정)와 카센터에서 일하는 아웃사이더 기질을 가진 아홉 살 연하의 친구 동생(천정명)의 연애를 다룬 로코물로 기억한다. 삼류 저질 잡지 기자,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여성 연상 커플, 기자와 카센터 엔지니어의 연애 같은 콘셉트는 당시로서는 나름 센세이션 한 면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몰입할 건덕지가 없던 걸로 기억한다. 재미없던 드라마라 기억나는 장면은 딱 한 장면이 다다. 역곡역 냉면집(인지 고깃집인지) 사장 아저씨가 품평한 장면이었는데, 장면보다도 품평이 어이가 없어 기억에 남았다.
지금이야 손현주가 주연으로만 나오지만 그때만 해도 감초 연기하는 조연급 연기를 많이 했는데 여우야 뭐하니에서는 약간은 양아치 같은 인상을 풍기는 역할을 했다. 하는 짓이 양아치스러워서 우리 방 사람들 모두 손현주 캐릭터를 안 좋아했다. 그런데 갑자기 역곡역 냉면집 사장 아저씨의 손현주에 대한 평이 180도 달라지는 순간이 있었다. 문제의 그 장면은 손현주가 허름한 노포에서 친구들과 서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소주잔을 기울이는 장면이었다. ('서서갈비'가 서서 먹는 고기집을 뜻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때까지 양아치라며 욕하던 사람이 갑자기 "저런 데서 친구들과 소주 마시는 남자는 좋은 사람"이라며 손현주 캐릭터를 자기가 그동안 오해했다고 선언한 것이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지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허름한 술집에서 친구들과 술 마시면 좋은 사람인가? 명품으로 치장하고 다닌 사람인 줄 알았는데 소박한 면이 있어서 좋은 사람이라는 건가? 합리성이라고는 1도 없는 그 얼토당토않은 기준,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포기하게 만든 그 기준의 정체를 나는 출소하고 나서도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일종의 남성연대였던 것이다. 분위기 근사한 값비싼 레스토랑을 좋아하는 여성들과 달리 허름한 술집에서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남성(아저씨)들의 문화에 대한 깊은 동질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 술자리에서 얼마나 추잡하고 지저분한 이야기가 오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그런 류의 동질감.
우정과 의리로 포장된 그 남성연대가 얼마나 허울 좋은 껍데기인지 나는 감옥에서 생생하게 겪었다. 감옥 안에서 남성 수감자들은 서로를 사장이라 부르며 깍듯하게 예우한다. 돈 많은 사장님들은 정작 감옥에 잘 오지 않는데 어찌 된 일인지 감옥에는 사장님만 넘쳐났다.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이 특별히 더 천박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서로를 "김사장" "이사장"이라고 부르며 존대하는 모습을 보면 특별히 더 고상한 사람들로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누군가 한 명이 면회든 교도관 면담이든 자리를 비우면 그때부터 그 사람에 대한 험담이 시작되었다.
방금 전까지 김사장 이사장 하면서 서로를 존중하던 상대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순간 가장 치졸한 방식으로 뒷말을 하기 시작한다. 다들 범죄 저지르고 와놓고 상대방을 사기꾼이라고, 범죄자라고 욕했다. 출소하면 꼭 연락하고 만나자고 다짐하는 아저씨들, 그러나 한 명이 먼저 출소하면 방에 남은 사람들은 먼저 나간 사람을 험담하고 나가서 만나자는 약속을 비웃었다. 그러면서 자기들끼리는 나가서 만나자는 약속을 굳게 했다. 누구나 비겁한 면은 있다지만 깍듯하고 고상한 예의 바로 뒤에 오는 조리돌림이란 정말이지 남자들 간의 의리라는 게 얼마나 가식적인지 깨닫게 해 주었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고? 남자 셋이 모이면 깨진 접시로 멀쩡한 사람 하나 난도질하는 게 일도 아니었다. 그건 자칭 조폭 아저씨도 자칭 총학생회 출신 아저씨도 다 똑같았다. 뭐 나라고 특별하진 않았으나, 나는 적어도 없는 우정과 의리를 거창하게 내세우진 않았다.
그 거창하고 허술한 남성연대 안에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인천구치소는 구치소기 때문에 형이 확정되어 기결수가 되면 이감을 가거나 인천구치소에 남아 일을 해야 했다. 여호와의 증인을 비롯한 병역거부자들은 관용부에서 나름 인기가 있었고, 분류과장은 나에게도 인천구치소에 남아 일할 것을 제안했다. 관용부 일이 아니라 방에서 봉투 접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감을 결심하기도 했지만, 그 허접한 남성연대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봉투 접는 방은 비슷비슷한 아저씨들로 득시글거리기 때문이다. 교도소로 이감 가서 관용부를 하면 여호와의 증인들과 생활할 가능성이 높은데 적어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아저씨들의 남성연대 같은 문화는 없을 테니까.
결국 나는 여우야 뭐하니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군산교도소로 이감을 갔다. 재미없었기 때문에 결말을 보지 못한 것이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여우야 뭐하니
연출: 권석장
각본: 김도우
출연: 고현정(고병희), 천정명(박철수), 조연우(배희명), 고준희(고준희), 손현주(박병각)
방송국: MBC
방송시기: 2006.09.20~2006.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