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고맙습니다>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이나 병역거부자들의 가까운 친구들은 병역거부자들이 감옥 이야기 하는 거 대체로 지겨워한다. 마치 군대 갔다 온 남성들이 사석에서 끊임없이 군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병역거부자들도 만나면 감옥이야기를 주구장창 하기 때문에. (물론 감옥 생활이 심한 트라우마로 남은 병역거부자들도 있지만 그이들은 전쟁없는세상 행사에 잘 오지 않는다.) "너네는 군대만 안 갔지 그래서는 예비역들과 뭐가 다르냐"는 지청구도 매번 이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예비역들의 군대 이야기와 병역거부자들의 감옥 이야기는 패턴이 비슷한 측면이 있다. 축구 이야기만 빼고(감옥에서는 다친다고 축구를 못하게 했고, 땅탁구나 족구가 가장 대중적이었다). 내가 더 힘들었네, 어떤 일이 더 힘들었네부터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대한 토로까지.
많은 군필자들이 그렇듯 병역거부자들도 고립감과 외로움을 솔직하게 드러내질 못했다. 걱정하는 사람들 안심시킨다고 아예 아닌 척하거나,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살핌을 갈구하거나.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연습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은 병역거부자들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아무튼 말이 많은 편인 나는, 하필 감옥도 여러 곳을 옮겨 다녀서 이야깃거리가 더 많았고, 그래서 감옥 이야기가 나오면 늘 주도권을 가지고 말을 했으니 지청구도 가장 많이 들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듣는 사람마다 재밌다고 하고, 여러 번 듣는 사람도 지청구를 하지 않는 이야기가 있는데,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다 써놓고 사람들이 재미없다고 하면 어쩌지? 걱정부터 든다.
감옥에도 텔레비전이 있다. 하지만 채널 선택권이 없다. 교도소에서 정해놓은 시간, 틀어주는 방송만 봐야 한다. 보통은 일과가 끝난 저녁 시간에만 틀어주고, 주말이나 휴일에는 좀 더 길게 틀어주지만 하루 종일 틀어주지는 않는다. 모든 방송은 녹화방송이다. 그나마 뉴스는 아침 뉴스를 녹화해 저녁에 틀어주어 시차가 별로 안 나는데 드라마는 보통 2주의 간격을 두고 녹화본을 틀어준다. 그러다 보니 수감자들은 스포일러에 무척 취약했다. 재소자들이 취약한 권리의 목록이야 차고 넘치지만 어쩐지 스포일러 방지권(?)이 없다는 것이 무척이나 크게 느껴지기도 한다.
스포일러는 사방에 도사려 있다. 잡지나 신문이 일차적이다. 수원구치소에서 드라마 하얀거탑을 즐겨봤는데, 종영을 얼마 남지기 않고 주인공 장준혁이 암에 걸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놓여있을 때였다. 과연 장준혁을 죽이고 드라마를 끝낼지, 아니면 살려놓고 끝낼지 무척 궁금하던 찰나, 마침 씨네21이 배달 왔다. 전국민적으로 인기 있는 드라마였고, 꽤나 잘 만들 수작이었으므로 씨네21도 하얀거탑 특집이었는지 표지가 하얀거탑이었다. 그리고 표지에 커다랗게 박혀 있는 글씨 "장준혁은 살아있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나는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죽는구나...' 아직 수원구치소에선 살아있는 장준혁이었지만 나 혼자 조용히 장례를 치렀다.
내가 당한 스포일러 중 최고봉은 친구한테 당한 거다. 역시나 수원구치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확실히 군산교도소나 청주교도소보다는 서울에서 가까운 수원구치소에 친구들이 면회를 자주 왔다. 자주 오니 이런 사단도 났다.)
당시 드라마 고맙습니다가 절정기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공효진이 홀아버지 모시고 조용한 시골마을에 사는 미혼모로 나오고, 서신애가 공효진의 딸이면서 HIV 감염인으로 나왔다. 세상에 절망했나? 암튼 세상 등진 사람처럼 그 시골에 오게 된 의사가 장혁이었고 공효진과 장혁 사이에 멜로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 드라마의 씬스틸러는 누가 뭐래도 신구였다. 공효진의 아버지이자 알츠하이머 환자로 나온 신구는 자주 정신을 놓고 아무에게나 존댓말을 하면서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인 초코파이를 건넨다. "초코파이 줄까요?"라는 인사와 함께. 이 인사말은 유행어가 되었고 덕분에 초코파이의 매출액이 드라마 시작 전에 비해 40% 가까이 올랐을 정도였다. HIV 감염인, 미혼모 같은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꽤 괜찮은 시선을 다룬 드라마로 많은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물론 선택권이 없기도 했지만, 나는 이 드라마 방영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감옥에서 틀어주기를 바랐다. 장혁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배우였지만 네 멋대로 해라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했던 때라 미래(공효진)와 복수 아빠(신구)가 나온다는데, 탈옥을 해서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확실히 공효진과 장혁의 러브라인보다도, 당돌하고 당찬 HIV 감염인 서신애와 한없이 순박하고 해맑을 수밖에 없는 알츠하이머 환자 신구가 드라마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감옥생활은 힘들지만 그래도 재밌는 연속극 한편이 있으면 다음 편을 기다리다 한 주가 후딱 가는 느낌이 들곤 했는데, 이때가 딱 그랬다.
아마 감옥 밖으로 쓰는 편지에도 이 드라마 이야기를 많이 했을 거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방사람들 흉보는 것도 지겨운데 편지에 새로운 이야기 쓸 게 뭐가 있었겠나. 드라마나 책 이야기였겠지. 그래서 친구들은 내가 고맙습니다를 즐겨보고 있다는 걸 다들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리가 면회를 왔다. 반가운 얼굴을 보니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고, 면회 시간 10분 동안 우리는 1초도 낭비하지 않으려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그러던 와중에 오리가 갑자기 까먹었던 중요한 메시지를 떠올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아 맞다! 용숙이 너 좋아하는 신구가 죽어서 어떡하냐?"
"뭐라고?"
순간, 놀람과, 당황스러움이 교차하는 내 얼굴을 보고 오리 얼굴엔 아차, 하는 표정이 지나쳤다.
정말로 몰랐다. 장준혁은 암에 걸렸으니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이라도 했지. 신구는 수원구치소에서는 너무나 멀쩡했고, 스토리 상으로도 신구의 죽음을 암시하는 그 어떤 복선도 없었다. 이용석이라면 몰라도 오리는 누구 놀리려고 거짓말하는 스타일은 아니니, 신구가 죽는 것은 참말일 거였다. 차라리 거짓말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오리의 정직함이 무척이나 날카롭게 느껴졌더랬다.
결국 신구는 죽었다.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자기 물에 빠지는 사고로. 수원구치소 수감자 모두가 그 갑작스러운 죽음에 놀랐을 테지만, 나는 홀연히 태연했다. 태연한 채로 신구의 죽음을 슬퍼했다. 공효진은 여느 드라마에서처럼 세상 어려운 일을 연달아 마주하고, 그러면서도 씩씩함을 잃지 않는 캐릭터였는데, 그 순간만큼은 공효진의 고난보다 내 감옥 생활이 더 거대한 고난처럼 느껴졌다. 공효진은 그래도 스포일러는 안 당하니까. 그래도 어쩌겠나. 내가 선택한 병역거부인 걸. 감내하고 살아야지, 공효진처럼 씩씩하게 살겠다고 마음먹는 수밖에 없었다.
고맙습니다
연출: 이재동
각본: 이경희
출연: 공효진(이영신), 장혁(민기서), 서신애(이봄), 신구(이병국), 신성록(최석현)
방송국: MBC
방송시기: 2007.03.21~2007.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