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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Mar 18. 2020

주인공은 언제나 선을 넘는다

짧은 리뷰


오후 작가의 전작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와 <나는 농담으로 과학을 말한다>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친구들에게도 여러 번 추천했다. 작가의 잡학다식함에 감탄했고, 유쾌하고 유머 넘치는 문장에 푹 빠졌다. 팬레터를 가장해서 전쟁없는세상 블로그 글을 청탁하는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청탁은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납득 가능한 거절이었고, 답장이 왔다는 것만으로도 팬으로서 만족한다!) 그래서 이번 책 <주인공은 언제나 선을 넘는다>도 무척 기대를 했다. 전작들에서도 조금씩 작가의 생각이나 정치적인 색깔이 드러났는데, 이번 책에서는 아예 대놓고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더더욱 기대를 하고 읽었다.


모두 11편의 영화에 대한 비평인데, 작가가 스스로 밝힌 대로 전통적인 영화 비평은 아니다. 영화의 짜임새나 미학을 논하지는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을 영화를 통해 하는 책이다. 어떤 챕터는 영화 전체를 글감으로 쓰고, 어떤 챕터는 영화의 아주 일부분만 가져와서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다루고 있는 영화는, 대중없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부터 한국 극장에서 개봉조차 안 한 영화까지 이것저것 다 들어가 있다. 뭐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이런 면이 오후 작가의 매력이니, 질서정연하고 체계 잡힌 글을 읽고 싶은 분들은 읽으면서 "뭐야, 왜 이렇게 지 멋대로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솔직한 소감을 밝히자면, 나는 개인적으로는 전작들보다 덜 재밌었다. 책이 부족해서는 아니고, 활동가들이 독자라면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을 거 같다.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들을 재밌고 쉽게 풀어가는 능력은 여전하다. 다만 전작들에서 만난 잡다한 지식(상추에서 마약성분이 나오고 그 때문에 상추 먹으면 졸린다거나, 당구공 때문에 플라스틱을 발견했다는 이야기 등)은 난생처음 듣는 신기한 이야기가 많았는데 이번 책에서 하는 이야기들은 여전히 잡학다식하지만 나에게는 익숙한 이야기가 많았다. 전작들이 자연과학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정보가 많이 담겼다면 이번 책은 사회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읽었을 때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직업 활동가인 나에게는 딱히 새롭지 않은 이야기, 시선, 정보가 많았다. 누군가에게 오후 작가의 책을 추천한다면 활동가들에게는 이 책 대신 <나는 농담으로 과학을 말한다>를 추천하고, 활동가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이 책을 추천할 거 같다.


가장 재밌게 읽은 챕터는 '스타워즈: 로그 원' 편이었다. 나는 스타워즈 시리즈를 썩 즐기는 편은 아니고 이 영화도 안 봤지만, 글을 읽는데는 무리가 없었다. 다른 스타워즈 시리즈와 로그 원을 비교분석하면서 영화에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는 해석이 무척 흥미로웠다.


멕시코 마약 카르텔에 맞선 자경단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 '카르텔 랜드' 편은 이야기하고 싶은 게 가장 많은 챕터였다. 사회운동의 수단으로써 폭력에 대해서 작가와 토론해보고 싶은 지점이 많았다. 이 챕터의 제목은 '법을 어기는 비범한 정신'인데, 사례로 프랑스의 '나는 낙태했다' 시위를 소개한다. 어쩔 수 없이 낙태 수술을 한 소녀의 어머니가 실형을 선고받고(당시 프랑스는 낙태가 불법이었다 한다) 이 판결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를 하는 와중에 유명 감독, 배우, 지식인 들 343명이 자신도 낙태를 했었다며 실명이 실린 공개 성명서를 발표한 사건이다. 이 챕터에서 시민불복종의 개념을 설명해줬으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법을 어기는 비범한 정신을 좀 더 풍성하게 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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