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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Apr 01. 2020

열심히 사는 게 뭐가 문젠가?

더 짧은 리뷰 -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사실 나는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을 한심하게 보거나,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힙하거나 쿨하게 묘사하는 흐름들이 적잖이 맘에 들지 않았다. 예를 들면『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와 같은 류의 제목이 쏟아져 나오는 분위기 말이다.(나는 이 책 내용은 모른다. 책에 대한 평가가 아니고 제목을 보고 받은 인상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젊은 세대에게 노오오오력을 강요하는 기성세대들, 혹은 죽도록 고생해봤자 사장 배만 불려주는 노동 현장의 현실을 생각한다면 이런 흐름들, 이런 삶의 태도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사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무슨 의미가 있을지 나조차도 의구심이 든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이 이 모양이면 나의 삶은 나아지지 않을 텐데, 그런 상황에서 세상을 그대로 둔 채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이 모양의 세상을 그대로 유지시켜 나가고 싶은 이들의 욕망일 뿐이라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만난 이들 중에서 대체로 노력하지 않거나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들은 이미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면 노동조합 활동을 할 때, 우리는 노동법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고 임금 협상을 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했는데 사장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회사의 안조차 만들지 않더라. 권력을 가진 이들은 그 권력을 그냥 행사하면 되기 때문에 열심히 할 필요가 없었다. 설득하기 위해 근거를 찾고, 논리를 만드는 일을 열심히 하는 이들은 대체로 휘두를 권력이 없는 이들이다. 


헌데 꼭 대단한 권력자들만 그러는 게 아니다. 그치들이야 원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텐데, 최근의 분위기는 얼핏 보면 썩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 보이는 이들조차도 열심히 사는 것을 촌스럽게 여기거나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멋있게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이게 마뜩잖았는데, 무엇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다 아래와 같은 문장을 보게 됐다. 


1970년대 중반 영국에서 계급 이동이 좌절된 하층 계급 남성 노동자들의 하위문화 중 하나가 '아무것도 안 하기(doing nothing)'이다. 그들은 왜 계급 상승을 위해 애쓰지 않을까. 그들은 왜 아까운 시간을 죽이고 있을까. 그들은 왜 공부도 하지 않고 노동도 하지 않고, 뭔가 재미를 추구하려 하지 않고 그냥 길거리에 앉아서 우유 갑이나 던지면서 아무런 의미 없는 소리를 지르거나 대화도 아닌 서로의 소음을 견뎌 가면서 친구가 됐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안 하기'는 '강하지만 강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기'로서 일종의 남성 되기 전략이다. "나는 진짜 쓰레기이고 난 아무것도 아니야." 이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구부정하게 구부리고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자기가 루저라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지만, 사실 마음속으론 자기는 굉장히 다른 걸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에 실린  글 「한국 남성의 식민지성과 여성주의 이론」의 한 구절인데, 정희진 선생님이 권김현영 선생님의 분석을 소개했다. 다른 일 때문에 참고하려고 읽던 책인데, 원래의 목적은 잊어버린 채 이 구절에 꽂혀버렸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삶의 태도, 열심히 살지 않기 위해 애쓰는 그 태도를 나는 불편해했지만 단 한 번도 그러한 태도가 '남성 되기'의 일환일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러한 삶의 태도를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이들은 대부분 남성이더라.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삶, 루저인 게 아니라 루저라는 것 보여주는 태도는 결국 우리에게 노오오오력을 강요하는 세상의 구조를 전복하지 못한다. 고래 배 속의 이물질인 것처럼 굴지만, 실은 고래 배 속에서 살면서 이물질들의 우위에 서고 싶은 찌질한 욕망일지도 모른다. 결코 고래 배 밖으로 나가는 일은 너무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일이니까. 


그래서 나는 열심히 살기로 한다. 고래 배 속에서 탈출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고, 때때로는 푹 쉬고. 딴 짓조차도 열심히.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야 하는 이 시간에 이렇게 열심히 딴짓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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