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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May 03. 2020

헨젤과 그레텔

연극 리뷰 


오랜만에 대학로에 갔다. 혜화역 4번 출구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날맹은 피곤한지 쌍꺼풀이 짙게 져 있었고, 조은은 우리를 만나고 첫마디가 "아 힘들어"였다. 나동도 힘들어 보였는데 혜화동 로터리에 있는 서점에서 자기가 쓴 책을 발견하더니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오래된 친구들. 같이 병역거부도 했고(물론 감옥 간 시기는 다르지만) 전쟁없는세상 활동도 같이한 이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뭔가 말실수를 하거나 말할 때 잘못하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지만 비판해야 할 때는 정신 바짝 들게 따끔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이들. 그래서 긴장할 필요 없이 편하게 말하고 편하게 웃을 수 있는 친구들. 우리는 종종 만나 수다도 떨고, 산에도 오르고, 전시회도 보고 그런다. 오늘은 하동기가 연출한 연극 <헨젤과 그레텔>을 보러 가는 길. 동기는 병역거부자다. 신학대 학생회장 시절 병역거부를 했는데, 출소 후에 갑자기 극단에 들어가더니 지금은 연출을 한다. 동기 덕분에 일 년에 연극을 한두 편은 보게 된다. 



솔직히 말하면 연극은 내게 익숙한 세계는 아니다. 일단 비싸고, 대학로도 멀고, 어떤 연극은 이해하기 어렵다. 요즘 무슨 연극하는지 찾아보는 정도는 아니지만, 기회가 되면 그래도 연극도 최대한 보려고 노력한다. 이야기이기 때문에. 나는 내가 하는 사회운동도 결국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운동, 정치, 예술 창작 모두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이야기를 누구에게 어떻게 하느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겹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존 레논이 노래한 '이매진'과 전쟁없는세상의 활동은 방식은 다르지만 이야기하는 내용은 같을 수 있다. 어쨌든 우리는 모두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고, 나는 다른 이야기꾼들의 이야기 방식에 관심이 많다. 나와는 다른 이야기, 나와는 다른 방식을 만날 때 자극도 받고 배울 게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적 심미안이 없음에도 전시회며 연극이며 기회가 될 때 부지런히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연극에 대해 비평할 깜냥은 안 되고, 재밌게 본 작품에 대해 내가 느낀 것을 뭐라도 남기고 싶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연극을 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리뷰를 쓴다. 5월 10일까지 공연을 하는데 이미 객석은 매진이다. 못 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5월 7일 공연은 유튜브로 생중계를 한다고 한다. 유튜브 백수광부 채널에서 8시부터 한다니까 많은 사람들이 꼭 보면 좋겠다. 


연극 <헨젤과 그레텔>의 프로그램북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 있습니다)


연극 <헨젤과 그레텔>은 현대 사회 노동 현실을 고발하는 동시에 자본주의의 숲에서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노력과 절망을 보여준다. 


자본이라는 거대하고 깊은 숲 속에 버려진 아이들
달콤한 동화 속에서 착취당하는 나와 당신의 노동 이야기


연극의 제목인 '헨젤과 그레텔'은 이 연극이 펼쳐지는 일종의 세계관을 만들어 주며 1막과 3막의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헨젤과 그레텔이 길을 잃고 헤매는 숲은 2막의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무대이며,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2막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아기돼지 삼 형제', '베짱이와 개미', '빨간 모자', '빨간 구두', '라푼젤', '양치기 소년', '성냥팔이 소녀'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각각의 동화는 지금 시대 노동의 현장으로 각색되어 있다. 


취업 시장에 진입해야 하는 청년들(아기돼지 삼 형제), 하루에 200개의 물량을 배달해야 하는 택배노동자(빨간 모자),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가난한 음악 생산 노동자(베짱이와 개미), 빠져나갈 수 없는 노동의 굴레를 쓴 학습지 교사(빨간 구두), 회사측 사람인 양치기에게 속으며 파업을 이어가는 쌍용차 노동자들(양치기 소년),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이 소환하는 구의역 김군과 반도체 노동자 황유미와 전태일(성냥팔이 소녀), 가발공장 여성 노동자들(라푼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혹시 최규석 작가의 만화책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본 사람이라면 이런 방식이 낯설지는 않을 거 같다. 우리에게 익숙한 동화를 비틀어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다루는 노동 문제는 대부분 현대 사회의 심각한 노동 문제들이다. 나는 노동 문제에 대해 잘 아는 편은 아니니 각각의 현안들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다. 


대신 연극이 사회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유심히 살펴봤다. 요즘 사회 이슈를 다루는 창작물 가운데 다수는 미안하지만 만듦새가 현저하게 부실한 경우도 많다. 뜻과 의미는 가상하지만 만듦새가 부실한 작품은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기 일쑤고, 그러다 보면 가상했던 뜻과 의미도 전혀 살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헨젤과 그레텔>은 꽤 짜임새가 훌륭한 연극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미학적인 측면에서는 비평할 깜냥이 안 되고, 다만 관객이자 활동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몰입감 넘치고 재밌었으며 사회 이슈를 다루는 것도 어설프거나 촌스럽지 않았다. 재미만으로도 충분한데, 뜻과 의미도 잘 살린 작품처럼 느껴졌다. 다양한 노동 사안을 다루면서 각각을 우리에게 익숙한 동화와 매칭 시킨 아이디어가 참신했고, 특히 각각의 매칭이 억지스럽지 않고 기발하게 느껴졌다. 창작자들이 공부도 많이 했고 고민도 많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쉬운 장면 하나를 꼽자면 '라푼젤' 에피소드다. 가발공장 여공들 이야기인데, 다른 노동 현장은 최근의 이슈들인 반면 이 이야기만 1970년대의 노동현장이어서 조금은 의아했다. 또 한 명 1970년대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전태일이고 이 장면은 개인적으로는 이 연극에서 백미였다. 피가 끓기로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파업을 다룬 '양치기 소년' 에피소드가 더 뜨거웠지만, '성냥팔이 소녀' 에피소드에서 김군과 황유미 다음으로 전태일이 등장할 때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시대가 다르고 하는 일도 다 달랐던 청년노동자들이지만, 전태일 시대의 시다들과 삼성 반도체 공장의 청년 노동자들과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청년 노동자들이 겪는 노동의 문제가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헨젤과 그레텔>은 현실을 고발하지만, 대안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심스럽다. 섣부르게 희망을 이야기하거나 그렇다고 냉소적으로 절망하지도 않는다. 3막, 연극이 끝나갈 즈음, 마녀의 과자의 집에서 탈출한 아이 한 명이 숲을 헤매다 만난 어느 소녀를 만나는데, 소녀는 숲을 빠져나가는 길은 알지 못하지만 숲에서 가서는 안 되는 길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고 그 길들에 출입금지 표지판을 붙이며 다니고 있었다. 아직 길을 찾지는 못했지만, 잘못된 방향임을 알리는 표지판을 세우는 것. 연극 <헨젤과 그레텔>이 하고 싶은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자본주의라는 숲에 이러한 표지판을 세우는 일 아닐까.



극단 백수광부 유튜브 채널에서 가져온 홍보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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