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리뷰
사회운동의 투쟁 현장을 세심하게 취재해서 성실하게 기록으로 남긴 좋은 르포는 생각보다 많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희정 작가의 글을 특별하다고 느낀다. 세심한 시선이나 성실한 접근 같은 것들은 기본이고 그에 더해 남다른 면이 있다.
이런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한 것은 《일할 자격》때부터였다. 이 책은 노동현장의 열악함과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 혹은 이 사회의 문화와 제도가 노동을 위계화하고 차별하고 혐오하는 모습 같은 것을 보여주는 책이 아니었다. 진보가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고 보수는 기업(자본)의 편에서 노동을 상품화하는 입장이라는 도식적인 구분을 이 책은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사뿐하게 넘어버린다. 책을 읽는 나는 (어쩌면 책을 쓴 희정 작가도) 이 책이 통념과 상식을 뒤흔드는 탓에 무척이나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다.
그리고 이번에 읽은 《뒷자리》 또한 희정 작가의 특별함을 보여준다. 부제 '어떤 일을 한 뒤의 흔적'이 이 책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노동자들, 어려운 싸움을 이어가는 현장의 주민들 이야기에 우리 사회는 인색한 편이다. 그렇지만 그나마 이들이 싸우고 있을 때는 이들의 목소리가 사회적인 메시지로 다뤄진다. 언론에서 기획기사로 심도 깊게 문제점을 파고들어 가기도 하고, 투쟁현장의 주인공들의 목소리를 담은 르포가 단행본으로 나오기도 한다. 이기든 지든 싸움은 끝나고(혹은 끝났다고 여겨지고), 사람들의 관심은 줄어든다. 어느새 새로운 투쟁 현장이 생겨나니까, 그쪽으로 관심이 옮겨가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래야 새로운 싸움도 이어나가지. 한국 사회는 어딜 가나 새로운 싸움 현장이 생겨나는 곳 아니겠나. 그런데 그 뒷자리에서 계속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은 싸움이 끝난 뒷자리의 사람들에 주목한다. 보통 이상의 감수성을 가진 작가라면 늘 이런 뒷자리의 이야기에 촉을 세우고 있을 거다. 하지만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그걸 글로 써내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나는 이 책의 컨셉 만으로도 희정 작가의 다음 책이 기다려진다.
1부 '여전히 남은 사람들'에서는 삶터를 침범 당해 싸움에 나선 이들이 싸움이 끝난 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밀양(송전탑), 매향리(폭격장), 나아리 마을(핵발전소) 모두 희정 작가가 오래전에 취재해서 기록을 남긴 싸움의 현장이자, 주민들의 삶터다. 시간이 흐른 뒤 이 투쟁의 뒷자리에 남겨진 이들을 다시금 인터뷰했다. 2부 '우리 싸움은 누가 기억하지?'는 마치 타임슬립물처럼 과거 현장의 투쟁과 지금의 현장을 잇는다. 롯데호텔 노동자들의 성희롱 집단소송은 20년 뒤 스쿨미투와, 114 한국통신 안내원들의 직업병 투쟁은 콜센터 노동자들의 현장으로.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연결성이 무척 흥미로웠다. 3부 '들리지 않아도 목소리는 존재한다'는 제목 그대로 우리 사회에서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존재들-정년을 앞둔 늙은 노동자, 고려인, 경리 노동자 이야기를 다룬다.
개인적으로 1부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 아마도 내 활동과 겹치기 때문일 것이다. 책에 나오는 매향리 주민들의 싸움은 한국 평화운동의 역사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지만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고, 나보다 조금 앞선 세대의 선배들에게 이야기로만 들었다. 밀양 송전탑 싸움이나 월성원전 인근 나아리 마을 주민들의 싸움은 나의 활동과 동시대지만 평화운동과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강하진 않다. 그렇지만 이 싸움들은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한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이전 반대 투쟁이나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투쟁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대체로 서울과 멀리 떨어진 동네, 정부의 밀어붙이기와 주민들의 저항, 길어지는 싸움과 지치는 주민들, 보상을 가지고 주민들을 갈라치기 하는 정부, 갈가리 찢긴 마을 공동체와 같은 특징이 반복된다.
인상 깊었던 까닭은 익숙하게 보아온 반복 때문이 아니다. 뒷자리에 남겨진 사람들의 처지가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도 아니다. 물론 그 어려움과 연관이 깊은 이야기인데, 사회운동은 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내게 큰 인상과, 고민 지점을 남겼다.
대추리, 강정마을, 매향리, 밀양 할 것 없이 싸움이 한창일 때는 모두가 비슷한 마음으로 투쟁을 이어간다. 하지만 이내 각자의 처지에 따라 입장이 달라진다. 특히 마을에서 살아가는 이들과, 이 싸움을 함께 하는 단체 활동가들의 처지와 입장은 무척 다르다.
마을 주민들은 처음부터 싸움이 직업인 활동가가 아니다. 각자의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생활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삶터에 불쑥 들어온 국가 권력 때문에 머리띠 두르고 투쟁가를 부르는 데모꾼이 되어버린 상황. 내가 겪은 마을 주민들은 필사적이었다. 싸움이 길어지면 포기하는 주민들도 늘어갔지만 그럴수록 남은 사람들을 더 필사적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삶이 걸린 투쟁, 자신들의 집과 직업이 그곳에 몽땅 있으니 인생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는 이들이다.
반면 나는 대추리에 가든 강정마을에 가든 투쟁은 일이고 삶과 투쟁이 완전하게 동일하지는 않았다. 뒷자리에 남아 삶을 이어가는 이들이 보기에는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들인 우리가 좀 덜 필사적인 것 같았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우리대로 다음 싸움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불사를 수는 없었다.
패배하면 삶이 무너지는 것 같은 사람들과, 패배하더라도 다음 싸움을 준비해야 하는 이들 사이에는 긴장과 갈등이 늘 생겨난다. 당사자들이 움직이지 않을 때 직업 활동가들이 아무리 애를 써봤자 투쟁은 조직될 수 없다. 하지만 활동가들이 배제된 당사자들만의 싸움은 문제를 일으킨 원인이나 사회의 구조를 바꾸기 어렵다. 당사자들은 삶이 걸려 있기 때문에 더 필사적으로 강력하게 싸울 수 있고, 직업활동가들은 삶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의 구조를 더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긴장과 갈등이 투쟁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갈등을 다루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다.
《뒷자리》는 자칫 잘못하면 대립항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들-삶이 투쟁이 되어버린 이들의 개인적 욕구와 욕망, 그리고 그들이 해내가는 싸움의 정치적인 지향을 모두 보여준다. 둘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으로 전환될까?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 생각이 머무는 뒷자리다.
리뷰를 마무리하려고 하다가 문득 내가 노동조합 활동을 하던 시기가 생각났다. 전쟁없는세상 활동을 하다가 나이 서른에 처음 들어간 출판사에서의 노동조합 활동. 전쟁없는세상 활동과는 다르게 노동조합 활동이 그 자체로 내게 일(직업)은 아니었다. 오히려 직장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한, 즉 생계 혹은 삶과 결합된 활동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더 필사적이었다. 평화활동가 이용석은 마라토너처럼 뛰지만(그마저도 혼자 완주하는 마라톤이 아니라 이어달리기 마라톤이어서 내 다음 주자한테 바통을 넘겨주면 된다는 마음으로 뛴다) 노동조합 분회장 이용석은 단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뛰었다. 일터가 망가지면 어차피 나는 여길 떠나야 한다는 마음으로.
그러다가 회사를 더 좋게 바꾸기 전에 내 마음과 영혼이 먼저 망가질 거 같아서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생계와 연결되긴 했지만 내 모든 삶이 걸린 싸움은 아니었고, 나는 나를 먼저 구하기로 했다. 나는 그 직장을 떠나도 당장 굶어 죽을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만약 내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희정 작가가 《뒷자리》에서 만난 성서공단의 노년 노동자 혹은 경리 노동자와 같은 처지였다면 말이다. 무엇이든 간에 그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고통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것은 없다. 고통의 위계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그래서 투쟁에 나서는 사람들이 자기보다 더 큰 고통 앞에서 스스로 입을 다물게 만드는 것이야 말로 권력자들이 가장 반기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질문을 어떻게 바꿔야 할까? 삶이 투쟁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이들을 마주하며, 삶을 위해 투쟁을 선택하는 이로서 말이다. 참으로 숙제를 많이 남겨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