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나는 좀처럼 누군가를 존경하지 않고 어른이라는 단어는 극도로 싫어하는데, 감히 홍세화 선생님만큼은 존경하는 분이고 한국 사회의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홍세화 선생님의 글을 좋아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되, 선생님의 글은 분석적이기보다는 웅숭깊은 느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시적이고 문학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책 <저항하는 평화>의 추천사를 부탁드렸을 때 선생님이 써주신 추천사를 몇 번이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이 구절이었다.
오늘 한국 땅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를 행하는 젊은이들에게 특별한 무엇이 있을까? 만약 특별한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나는 신념 또는 용기 같은 것보다는 차라리 섬세함이라고 말하고 싶다. 잘 부러지기도 하는 강인한 것과는 오히려 거리가 먼, 딱히 무엇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그래서 나의 언어 능력으로는 기껏 인간의 어떤 정서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유약해 보일 정도로 섬세한 어떤 ‘결’이라고나 할까. 가령 모임을 마치고 뒤풀이까지 마치고 각자 신발을 신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거리에 나섰을 때 목덜미를 휘감으면서 각자의 계급적 처지와 홀로 맞닥뜨리게 하는 찬바람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게 하는 인간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것과 흡사한 어떤 것... 한마디 덧붙인다면, 이념으로 억압할 수는 있어도 억지로 갖게 할 수는 없는 것...
-<저항하는 평화> 추천사 중에서
선생님의 글은 늘 아름다우면서도 긴장감을 곧추세우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세상 모든 저자들이 자기가 쓰는 글만큼 살아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다들 자신의 가장 좋은 사유만을 고르고 골라서 책으로 쓸 테니까. 좋은 글을 쓴 사람을 여럿 알지만 자기가 쓴 글보다 훌륭한 실제 인물을 나는 알지 못한다. 반대로 좋은 글을 썼지만 삶이 개차반인 사람들은 제법 많이 봤다.
내가 겪은 홍세화 선생님은 글과 삶의 차이가 가장 나지 않는 분이었다. 사실 내가 글보다 더 좋아했던 것, 더 닮고 싶었던 건 홍세화 선생님의 태도였다. 삶을 대하는 태도, 사회를 대하는 태도, 진보 운동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들.
2005년 초에 우리는 전쟁없는세상 후원회장인 홍세화 선생님께 새해 인사를 드리러 갔다. 선생님은 한겨레 신문사로 우리를 부르셨고, 숙대 앞에 있는 쏘렌토에서 식사도 사주셨다. 소식지에 실을 인터뷰를 마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는 선생님께 젊은 활동가로서 우리의 고민을 말씀드렸다.
당시 나를 포함해서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대부분은 대입 논술학원 첨삭일로 돈을 벌고 있었다. 그때 전쟁없는세상은 부러 활동가들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 돈이 없기도 했고, 우리들 스스로가 돈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으며 하고 싶은 활동을 매진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다들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활동시간을 확보하면서도 생계를 유지하려면 짧게 일하고 어느 정도 돈을 벌 수 있는 일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논술학원 알바가 딱이었다.
돈은 확실히 많이 벌었다. 맥주 500cc가 1500원~2000원 하는 시절이었는데, 당시 논술시장이 잘 나갈 때여서 우리는 1600자 한 편 첨삭을 하면 9천 원~1만 원을 벌었으니까. 많은 돈을 버는 것보다 더 불편했던 것은 우리가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학벌주의, 학벌에서 이어지는 계급 피라미드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자각이었다. 게다가 당시에 홍세화 선생님은 학벌없는사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계셨으니, 우리는 선생님 뵙기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군대는 거부하는데, 대입 사교육으로 돈 버는 것을 거부하지 못하는 우리의 고민을 선생님께 털어놓았다.
선생님께서는 늘 그렇듯 잠시 생각과 말을 고르신 뒤 조용하게 말씀을 이어가셨다. 당신이 프랑스에서 돌아와서 깜짝 놀랐던 것이 있는데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너무나 훌륭하게 그야말로 거의 100%로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다는 거였다. 그런데 더 놀란 것이 있는데 그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면서 더 이상 100%로 살기 어려워지면 완전히 포기하고 0%로 살아버리는 걸 많이 봤다는 것이다. 원래 많이 가진 사람들은 100%에 가까운 위치에서 시작하고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은 0%에 가깝게 시작하는데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내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가 아니라고 하셨다. 내 삶이 어느 방향으로 향해가고 있는지가 중요한 거라고, 지금 0%에 가깝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조금씩 100% 쪽으로 이동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 말이 젊은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고 기억한다. 적어도 나는 활동가로 살면서 아주 현실적인 고민 앞에서 흔들릴 때마다 그때 홍세화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을 다시금 생각한다. 내가 해야 하는 노력이 무엇인지 일깨워주는 말을.
또 한 가지.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내 삶에 큰 지표가 되는 말씀도 하셨다. 교육이라는 것은 원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힘을 키우는 것인데, 한국에서는 좌파든 우파든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심는 것을 교육이라고 생각한다는 말. 내가 하는 말이, 내가 주장하는 바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나는 홍세화 선생님의 말과 태도로부터 배웠다. 특히 사회운동, 진보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부터도 여전히도 그럴 때가 있는데, 세상을 좋게 만드는 일-다시 말해 진보적인 사회운동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많이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표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것이 사회 정의라면, 그것은 사람들의 자발적인 참여로만 가능한 것이니까.
선생님께 배운 삶의 태도, 진보와 사회운동에 대한 태도 덕분에 나는 나에게도, 동료들에게도 너그러운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홍세화 선생님을 떠올릴 때 투사, 전사 같은 느낌이 아니라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든다. 선생님은 극우나 보수주의자, 혹은 사회적 불평등과 싸울 때는 거침없는 투사였지만, 사회 진보를 위해 노력하는 젊은 투사들에게는 해야 할 말을 정확하게 하시면서도 너그러운 품격을 보여주셨다. 활동가로서 내 삶을 긍정하고, 그러면서도 변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것은 분명 홍세화 선생님의 그 말씀 덕분이다.
선생님은 지식인이었지, 사회운동을 조직하고 캠페인을 기획하는 활동가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깊은 고민을 보여주셨고 또한 저항의 품격을 보여주셨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사회의 부조리와, 극우적인 보수와 싸웠지만 홍세화의 무기는 비꼼, 비아냥, 희화화 같은 것이 아니었다. 혼자서 점잖빼느라, 선비질 하느라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늘 인용했던 나오미 울프의 말 "싸우는 과정 자체가 그 싸움을 통해 획득하고자 하는 사회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내 책 <병역거부의 질문들> 추천사에 "시민사회운동이 팬덤화, 체제내화의 경향에 주춤거리는 때에, “회의(懷疑)하면서 전진하자!”라는 구호가 사파티스타만의 것이 아니라고 믿는 모든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라고 써주셨는데, 선생님이야말로 회의(懷疑)하면서 전진하는 이 시대의 진보 지식인이셨다. 회의하지 않고 전진만 하는 이들이 진보의 원칙을 망각하는 동안에도, 전진하지 않고 회의만 하는 이들이 보수파의 나팔수가 되는 동안에도 선생님께서는 회의하며 전진하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 몸소 보여주셨다.
진보를 위한 투쟁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저항이 얼마나 고결한 인간의 행위인지 깨닫게 해 준 홍세화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고 나는 내일은 오늘보다 한 발짝 0%에서 멀어져 100% 쪽으로 이동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