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같은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좋아했다. 세상이 이렇게나 망가졌는데, 착하거나 고상한 태도로 말하는 사람들을 한가한 사람들처럼 바라봤다. 강고하고도 흔들림 없는 입장을 거침없이 설파하며 우리와는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과 논쟁하고 상대방을 논리로 압살 하는 선배들이 멋있다고도 생각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우리 과에 굉장히 착한 형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선배는 나와 함께 사회과학 소모임을 했지만 온건한 성향이었고, 당시 돌풍이 일었던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다. 우리가 함께 속했던 소모임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곳이었고, 현실정치인들은 죄다 보수정치인에 개량주의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그 선배를 맹비난했다. 개량주의라고. 현실정치의 한계를 구구절절 읊으며 선배가 한마디 반박도 하지 못하게 몰아붙였다. 지난 인생의 후회하는 장면 중 하나다.
그 당시에는 선명한 입장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선명한 입장을 함께 고수하는 '동지'들이 좋았던 거 같다.
직업적인 활동가가 된 지금의 나는, 이제는 어떤 사람의 입장보다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람들의 입장은 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여러 활동을 경험하며 깨달았다. 예전에는 다른 입장과 맞붙어 싸워서 상대방을 내 입장으로 전향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억지로 설득하려고 하지 않고 각자의 입장을 존중하면서도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찾아보려 한다. 연대란, 같은 입장과 처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입장과 처지인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거라는 걸 배웠기 때문에.
입장의 다름을 인정하고 나면 중요한 것은 입장보다는 태도다. 그 사람이 어떤 입장을 가졌는지보다 어떤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입장이 다른 사람들과는 함께 일할 수 있다. 아니, 모든 일이 결국엔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배경과 인식과 역사를 가지고 있는 그룹끼리 연대활동을 할 때 토론은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한 토론이어야지 설득하기 위한 토론이어서는 안 된다. 그룹끼리만이 아니라 개인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같은 비전을 공유하는 그룹 안에서도 개개인별로 입장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억지로 입장을 통일하려고 하면 이럴 때 토론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소수의 침묵을 강요하거나 전향을 강요하는 폭력이 된다.
서로 입장이 달라도 함께 하는 사람들은 상대방과 다른 면을 찾는 것에 에너지를 쏟기보다는 서로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이런 사람들과는 얼마든지 함께 할 수 있다. 저 사안에서 의견이 너무 달라 함께 못하더라도 이 사안은 또 같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태도를 싸가지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태도란 인성에 대한 것이기보다 훨씬 더 실용적이고 전략적인 뉘앙스다. 지금 당장 절대적으로 달성해야 할 목표가 있다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나의 원칙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의 원칙을 훼손하려들지 않으면서 얼마나 유연해질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일이 되게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강하게 내세우기보다는 자신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고 함께 하려는 태도를 지녔다. 거침없이 강한 입장을 내세우며 자신의 선명성을 뽐내봤다 남는 것은 앙상한 자존심뿐이다. 이제 나는 데모로 밥벌이를 하는 프로페셔널이니까, 일이 되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입장의 선명성보다는 너른 태도를 가진, 원칙을 소중하게 지켜가면서도 다른 이들의 원칙을 존중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