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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Apr 05. 2020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짧은 리뷰


내 인생은 무척 운이 좋았다. 나는 큰 불편과 어려움 없이 40년을 살았다. 병역거부로 감옥에 다녀온 것만 뺀다면 내 삶은 한국 사회의 주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적은 없었지만, 반대로 지독하게 가난한 적도 없었다. 임대아파트에서 10년째 살고 있지만, 덕분에 집 걱정을 하질 않는다. 나는 월세를 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드문 사람이다. 동산이고 부동산이고 뭐 제대로 된 게 없지만, 반대로 누군가에게 빚을 진 적도 없고 은행 대출을 받은 적도 없다. 대학교 등록금 대출은 부모님이 갚아주셨고, 서른 살에 파주로 이사오면서는 부모님께 전세보증금 3000만 원을 빌렸지만 3년 만에 다 갚았다. 그것 말고는 나는 돈을 빌려본 적이 없다. 그리고 나는 남성, 이성애자, 비장애인에 학교 다닐 때는 성적도 곧잘 나와서 어디서든 차별받거나 무시당한 기억이 없다. 병역거부도 남들이 보기엔 엄청난 손해 혹은 피해일 수도 있지만, 사실 내겐 별로 그렇지 않다. 어떤 경우엔 감옥 갔다 온 일이 훈장이 되기도 하고, 나는 그 훈장이 필요할 땐 종종 써먹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인생에서 책읽기와 글쓰기가 큰 비중은 아니었다. 나는 늘 책을 읽고 다양한 종류의 글을 썼지만, 그 일을 못한다고 해서 내 인생이 무너지리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혹은 악착같이 책을 읽고 글을 쓸 필요가 없었다.


여성 작가들은 모두 크게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평생에 걸쳐 편견과 차별, 폭력에 맞서야 했다. 찬사만 받은 작가도 없었다. 혹평에 좌절하지 않았다. 근거 없는 소문과 오랫동안 싸워야 했다. 순간순간 닥쳐오는 난관을 직접 돌파하며 꾸준히 성장했다. 살면서 죽을 고비도 숱하게 넘겼다. 어떤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한 문장 한 문장에 자신의 전부를 걸었다.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서문 중에서


다시 말해 나는 한 문장에 내 전부를 걸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았다.


녹색연합에서 비폭력 트레이닝을 진행한 날 대학로 서점에서 책을 샀다.


내게 독서와 글쓰기는 취미 생활이었다. 20대에는 주로 소설과 시를 읽었다. 책 읽기도 글 쓰기도 허영심이 가득 차 있었다. 그때 쓴 글을 지금 나는 보고 싶지 않다. 감옥에서는 책 읽고 편지 쓰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주구장창 책을 읽고, 편지를 썼다. 혼자서 책 읽고 편지 쓰다 보니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게 되고 허영을 많이 덜어냈던 거 같다. 서른 살에 출판사에 입사하고는 필요를 충족시키려고 책을 봤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필요한 정보와 시선을 얻기 위해 책을 봤다. 공부하지 않으면 싸울 수 없었다. 노동조합 활동과 관련된 글을 썼다. 공문을 쓰고, 조합원들에게 단협의 결과를 알리는 글을 쓰고, 노동조합 활동을 하며 느낀 답답함과 고민을 SNS에 썼다. 퇴사한 이후에는 주로 수학, 과학 분야 책을 많이 읽었다. 순수한 취미 생활이었다. 차츰 공부가 재밌다고 생각했다.


쓰지 못해 죽거나, 죽지 않기 위해 쓰는 삶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출판사에 다니면서는 책과 글을 혐오하기도 했다. 책 많이 읽고 글 많이 쓰는 위선적이고 나쁜 사람들을 여럿 봤다. 노조가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항의하면 아이히만의 악의 평범성이 어쩌고 홍세화 선생님이 말씀하신 똘레랑스가 저쩌고 하는 식으로 대답하는 사장 같은 부류들 말이다. 나쁜 놈은 많지만 그중에 더 나쁜 놈들은 주로 가방끈 길고 책 많이 읽은 놈들이었다. 책을 멀리하지는 않았지만, 글은 꾸준히 썼지만(출판노동자가, 사회운동 활동가가 글을 쓰지 않고 월급을 받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나는 글쓰기와 책읽기에 불신이 가득했다.


요즘은 조금씩 내 생각이, 내 태도가, 내 삶이 바뀌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고독, 외로움, 쓸쓸함. 이런 단어들은 내 삶에 없었다.(감옥에서 잠깐 지낸 기간을 뺀다면) 그런데 문득 이런 감정들이 내게도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다. 고독한 사람이, 외로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독하고 외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책과 글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시점에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읽었다.


흠결 없고 상처 없는 완벽한 인생을 살았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서문 중에서


흠결이야 많고 완벽한 인생이라고 할 순 없지만 여전히 나는 글을 못 써서 죽는다거나, 살기 위해 글을 써야 하는 인생은 아니다. 어쩌면 그런 감각은 내 인생에는 도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살면서 처음 고독과 외로움을 마주해야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책읽기와 글쓰기가 예전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화목한 가족, 좋은 친구와 동료들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큰 걱정 없이 하며, 무엇하나 크게 부족할 것 없고 엇나갈 것 없는 인생에도 고독과 외로움이 필요한 법이니까.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에 나오는 스물다섯 명의 여성들만큼은 아니지만, 책읽기와 글쓰기가 내게도 중요해졌다.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읽고나서 다짐 혹은 바람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들을 사봐야겠다. 수전 손택의 책은 사놓은 책부터 읽자. 박경리 토지를 다시 한 번 읽고 싶은데, 살면서 기회가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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