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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Apr 29. 2020

아몬드

짧은 리뷰

세상 일은 늘 예상하지 못한 우연을 만들어 낸다. 아마도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나는 손원평 작가의 소설 <아몬드>를 보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화제의 소설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읽어야 할 책이 한두 권이 아니니 꼭 읽어야 할 책들 먼저 읽었을 테니까.


코로나로 인해 큰 조카는 초등학교 입학을 못 하고 있고, 둘째 조카는 유치원 입학을 못 하고 둘 다 꼼짝없이 집에 있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하는 동생은 자기만의 시간이 절실했고, 그러다 보니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책을 읽게 되었다고 한다. 집안일을 하거나 뭔가를 만들면 쪼르르 와서 참견하고 자기들도 하겠다고 난리법석인데 신기하게도 책을 읽으면 가만히 두더란다.


동생네 가보니 아이들 책만 빼곡하던 책장 한 칸이 어느덧 동생이 읽은 책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내가 추천한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과 <보건 교사 안은영>, 옛날에 내가 사서 보고 동생 읽으라고 줬던 <완득이>와 <위저드 베이커리> 사이에 손원평의 <아몬드>가 있었다. 워낙 유명한 소설이고, 다른 소설들은 이미 나는 다 읽은 거라서 자연스럽게 펼쳐보게 되었다.



큰 조카가 옆에서 관심을 보이길래, "삼촌이 책 읽어 줄까?" 하며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 소설의 첫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그날 한 명이 다치고 여섯 명이 죽었다. 먼저 엄마와 할멈. 다음으로는 남자를 말리러 온 대학생. 그 후에는 구세군 행진의 선두에 섰던 50대 아저씨 둘과 경찰 한 명이었다. 그리고 끝으로는, 그 남자 자신이었다.


아뿔싸, 유명한 것만 알았지 무슨 내용인 줄 전혀 모르고 조카에게 읽어주려던 건데, 첫 문장부터 여덟 살짜리에게 읽어줄 만한 소설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서둘러 책장을 덮었지만, 내 마음은 이미 다음 문장을 너무나도 궁금해하고 있었다.


(이다음부터는 스포일러 주의. 원치 않으면 읽지 마시오)


이 책을 다 읽는데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을 정도로 몰입감이 최고다. 물론 뒤로 갈수록 초반의 긴장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쉽다. 그 아쉬움은 내 취향 탓이지 소설의 짜임새가 아쉬운 건 아니다. 한 편의 소설이고 하나의 이야기지만, 내겐 세 가지의 이야기로 읽혔다.


첫 번째 이야기.


소설의 주인공은 태어날 때부터 감정을 담당하는 뇌의 편도체가 작아서 일체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이다. 첫 문장에서부터 살인사건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고, 정말이지 그 주인공은 자신의 할머니와 엄마를 포함해서 여섯 명이 죽고 한 명이 다치는 일을 바로 눈 앞에서 겪으면서도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다. 당연하게도 남과 다른 이 소년은 '괴물' 취급을 받는다.

네가 특별해서 그러나 보다. 사람들은 원래 남과 다른 걸 배기질 못하거든.
에이그, 우리 예쁜 괴물.


이 소설은 그러니까 정상성에 대해 질문한다. 남들과 다르면 괴물 취급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지 묻는다.


두 번째 이야기.


할멈이 죽고 엄마는 식물인간이 되고, 홀로 남겨진 주인공은 고등학생이 된다. 괴물이니, 왕따다. 거기서 또 다른 괴물을 만난다.


그래서 말인데, 나도 그냥 순수하게 궁해서 질문 하나.
그럼 넌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이 소설은 성장과 우정에 대한 이야기다. 괴물이 괴물과 만나는 이야기. 괴물이 인간이 되어 가는 이야기. 별 거 아닌 문장이었을 텐데 저 문장이 뼈를 때린다. 괴물이 또 다른 괴물에게 던진 아무것도 아닌 질문인데, 나한테 하는 이야기 같다. 나는 과연 커서 뭐가 되고 싶은 건가? 이미 다 컸지만, 앞으로 뭐가 되고 싶은 걸까? 앞으로 뭐가 될 수 있을까?


세 번째 이야기.


주인공은 통증을 느끼지만 감정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아프면 그냥 아프지 맞는 게 두렵지 않은 괴물. 또 다른 괴물은 겉으로는 쎈 척하는 약해 빠진 아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게 모두 약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강한 것을 동경하며 생기는 나약함의 표현


이 소설은 폭력과 두려움, 용기와 허세에 대한 이야기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괴물이 고통의 존재와 의미를 알면서도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괴물 아닌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당신들은 왜 폭력을 외면하거나, 약해 빠진 것을 가리기 위해 괜히 센 척을 하는지 묻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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