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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Apr 30. 2020

호시절

더 짧은 리뷰  - 『어른이라는 뜻밖의 일』


머리 아픈 하루, 괜스레 막걸리가 마시고 싶었다. 코로나로 난생처음 해보는 캠페인을 하게 되었는데, 이번에 확실히 나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의 전체적인 그림을 스스로 그리지 못하면 굉장히 불안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


병역거부자의 날 행사를 코로나 때문에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시도하는 중이다. 새로운 건 좋은데, 프로세스를 전혀 알지 못하는 데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스트레스엔 역시 술. 이유는 모르겠지만 막걸리가 땡겼고, 막걸리를 마시며 볼만한 책이 뭐가 있을까 찾던 중에 역시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김현 시인의 산문집 <어른이라는 뜻밖의 일>을 들었다.



그저 담백한 표지와 제목, 그리고 목차가 한없이 맘에 드는 책이다. 내용은 솔직히 말하면 표지와 제목, 목차만큼 맘에 드는 건 아니다. 책이 별로라는 건 아니니 오해 말길. 요즘 나는 확실히 수학이나 과학의 언어로 쓰인 글을 좋아한다. 명확하고 정확한 표현과 빈틈없는 논리 전개. 군더더기 없는 묘사가 빛나는 문장이 좋다. 그런데 김현 시인의 산문은 표현이 명확하지 않고 논리는 엉성하며, 묘사는 과하다. 덕분에 더 많은 상상을 하고 더 감칠맛 나게 할 수는 있는데, 요즘 내가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아주 천천히 어쩌다 한두 편씩 읽어 내려가고 있는 책이다.


책갈피는 '내쫓기는 순간'에 꽂혀 있었다. (이 책의 1부에 실린 글의 제목은 모두 "~하는 사람" 이런 식이고 2부에 실린 글은 모두 "~하는 순간" 이런 식이다. 퍽 재밌는 제목 짓기다.) 막걸리를 넘기며 한 문장씩 천천히 읽었다.


포은로(망리단길이라고 불리는)를 걷다가 '호시절'이라는 카페를 보고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호시절'이라는 제목의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호시절, 자신의 호시절, 호시절의 호시절, 망원동의 호시절들을 두루 생각하다 보니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로 이야기는 넘어간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내쫓기는' 거 아닌가. 자연스럽게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내쫓길 위기에 처한 신촌의 헌책방 공씨 책방을 이야기한다. 그곳에서 진행된 프로젝트, 그 프로젝트에서 나눈 고민들-"헌책은 호시절이 지난 책일까, 그런 책들을 모아 파는 책방은 헌공간이기만 한 걸까"-을 풀어 보이며 "아직 거기 현재하는 것만으로도 호시절인 공간이 있다"고 천천히 또박또박 이야기한다.




문득 중학생 시절 자주 다닌 가게 두 개가 떠오른다. 이제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을 가게들. 젠트리피케이션 때문일 수도 있지만 세상이 바뀌어 존재할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가게들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모르지만, 2020년에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집은 처음으로 아파트로 이사 갔다. 그전까지는 아파트 사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가장 부러워한 것은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친구가 경비실에서 열쇠를 찾아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 지금 생각해보면 집에 가면 엄마가 늘 간식이며 따뜻한 밥 챙겨준 내가 훨씬 복 받은 거였는데, 그때는 어린 마음에 그랬다. 나도 경비실에서 열쇠 찾아서 문 열어보고 싶었다. 요즘은 뭐 열쇠로 문 여는 집도 없겠지만 말이다.


아파트 상가도 내겐 신세계였다. 건물 하나에 학원이며, 슈퍼며, 분식집, 미용실 들이 모여있다니. 단지 중앙에 위치한 건물 한 동에서 모든 걸 할 수 있는 게 무척 신기했다. 그 상가의 많고 많은 가게들 가운데 내가 가장 애정하고 자주 찾은 곳은 두 군데였다.


만화대여점과 음반가게.


만화대여점에는 친절하게도 앉아서 만화를 볼 수 있게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돈 내고 만화책을 빌리는 그곳에서 나는 두세 권을 앉은자리에서 읽고 나머지 두세 권을 빌려가서 집에서 읽었다. 동네에 공공도서관이 없어서 대여점에서 소설책도 빌려봤다. 주로 <퇴마록>을 빌려봤고 <베니스의 개성상인>이라는 책도 빌려봤다. 나는 그게 셰익스피어의 책을 현대물로 각색한 건 줄 알았다. 마치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개성 상인이 개성 넘치는 상인인 줄 알고 보기 시작했는데, 역사 시간에 배운 그 개성(에 사는) 상인이라는 걸 알고 어찌나 놀랐는지.


음반가게는 내 단골 가게이자 그 시절 내가 음반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가게이기도 했다. 거기서 나는 내 인생 첫 음반(더클래식 1집 테이프)을 시작으로 꽤 많은 테이프를 사모았다. 신승훈, 김건모, 서태지의 음반이 나올 때 시내 음반가게들은 줄을 서서 산다고들 하는데, 우리 아파트는 광주 시내 가장 끄트머리에 있었고 상가도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 있어서 도로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인지 나는 한 번도 줄을 서본 적이 없었다. 나름 홍보에 신경을 쓰는 가게였는데, 유명 가수들의 신보가 나오면 꼭 형광색 A4 종이에다 써서 가게 유리에 붙여두어 눈에 확 띄었다. 영어 알파벳에 자신이 없으셨는지 꼭 한글로만 쓴 것도 기억에 남는다. '디제이 독 2집 발매' 이런 식이었다.




사라지는 것들이 못내 아쉽고, 어떤 것들은 그것과 함께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중요한 것들까지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 어떤 사라짐은 우리가 막을 수 없는 것들도 있다. 만화대여점과 음반가게가 사라지는 것처럼. 그래도 그것들과 함께 사라져버리는 중요한 것들만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람들은 대부분 지나간 것들, 사라진 것들에서 호시절을 찾는다. 나도 그렇다. 이렇게 빨리 변하면서 안전망이 부족한 사회에서는 미래는 기대보다는 불안감이 클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 호시절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길 바란다. 사라진 것들, 지나간 것들을 가끔씩만 그리워하고 거기에 오래 머물지 않고 싶다. 내 호시절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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