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용석 Apr 15. 2020

슬픈 노래를 들어요

박창근의 '이유'와 윤영배의 '선언'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엄마한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엄마 나는 왜 슬픈 노래가 좋지? 장조보다 단조 노래들이 더 좋아. 전학을 많이 다녀서 친구들하고 매번 작별해서 그런가?"


나는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을 텐데, 엄마는 전학 자주 다니게 한 게 미안해서 마음이 크게 아팠다고 한다. 어린 시절 경험이 성격에 영향을 끼쳤다면 나는 오히려 신나고 즐거운 노래를 좋아했어야 할 것이다. 전학 자주 다닌 건 썩 즐겁진 않았지만 그것 말고는 아주 평탄하고 평화롭고 화목한 삶을 살았으니까. 엄마는 그런 면에서는 나한테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그 말이 마음에 여전히 남으신 거 같다. 


확실히 나는 슬픈 노래를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은 대부분 그렇다. 더러는 밝은 노래도 있지만, 그런 노래들조차도 분위기가 방방 뜨는 노래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초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그저 내가 댄스곡을 안 좋아하고 발라드를 좋아한다고 여겼다. 나중에 여러 음악들을 접하고 나서야 내가 좋아하는 게 발라드가 아니라는 걸 댄스곡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가사든, 멜로디든, 혹은 가수나 작곡가의 개인적인 삶의 역사에서든 슬픔이 짙게 배어 있는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슬픔은 뭐랄까 어떤 구체적인 사건에서 발현하는 격한 감정이라기보다는 정서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잔잔하고 차분하고 서늘한 감정에 가깝다. 예를 들어 엘라 피츠제럴드와 루이 암스트롱이 함께 부른 신나는 곡들을 들을 때도 나는 왠지 모르게 애써 밝게 노래하는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슬픔과 우울 같은 것들이 느껴지고, 그 감정에 더 조응하게 된다. 


대학 때 집회에 가서 투쟁가를 듣고 부를 때도 그랬다. 행진곡 풍의 장엄한 노래들이나, 격한 슬픔이나 분노를 쏟아내는 격정적인 곡조와 가사보다는 낮고 잔잔하게 슬픔을 바라보고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노래를 좋아했다. 사실 내가 접할 수 있는 투쟁가 중에는 그런 노래가 많이 없었다. 그중에 딱 한 곡 기억에 남는 곡이 있다. 박창근의 '이유'. 


박창근의 '이유'


내게 목을 죄는 쇠사슬을 준다면  나는 순순히 응하진 않을 거야 물어볼 거야 

내게 사랑을 준다면 나는 쉽게 그것을 말하진 않을 거야 침묵할 거야 

왜 내가 인정해야 하는지 왜 내가 상처를 받아야 하는지 그 대답을 들어야만 할까 봐 

그것이 내가 줄 최선의 것인지 나는 어떤 책임을 다 할 수 있는지 창문을 열어 새벽바람을 맡을 까 봐 

꽃이 피는 이유를 꽃이 지는 이유를 함께 사는 이유를 시기하는 이유를 

기뻐하는 이유를 미움받는 이유를 죽어가는 이유를 기도하는 이유를 

난 물어보고 싶어 살아가는 이유를 난 물어보고 싶어 함께 살아가는 이유를


이게 딱히 투쟁가인지는 모르겠지만, 운동권들 말고는 이 노래 아는 사람이 없으니 투쟁가라고 봐도 괜찮지 않을까. 20대 때 무척 많이 듣다가 한 몇 년 이 노래의 존재 자체를 잊고 지냈는데 며칠 전 갑자기 이 노래가 생각나서 다시 듣고 있다. 


가사를 곰곰이 듣다 보니 최근 몇 년 사이, 그러니까 '이유'를 전혀 듣지 않고 지낸 시기에 많이 들은 노래가 하나 생각났다. 다시 말하면 '이유'가 채워줬던 어떤 감정을 최근 몇 년 간 이 노래가 채워준 셈이다. 윤영배의 '선언'이다.  


윤영배의 '선언'


나는 비매품이라 나를 팔지는 않아 언제라도 

나는 거부한 거야 거절당한 게 아냐 누구라도 

지금 이 순간은 여러 번 반복되는 게 아니야 연애처럼 다짐처럼 

나의 꿈은 나고 너의 꿈은 너고 우리의 꿈의 주인공은 지금 여기 우리 나의 내 하루의 

나를 일으켜 네 손을 마주 잡고 달려 알 수 없는 세계 

어딘가에 닿아 아득한 눈이 부신 그곳 

나는 하나뿐이라 거래할 수도 없어 얼마라도 

나와 같은 생각이 온 세상에 가득 차 넘치는 날 

지금 이 순간은 여러 번 반복되는 게 아니야 연애처럼 다짐처럼 

나의 꿈은 나고 너의 꿈은 너고 우리의 꿈의 주인공은 지금 여기 우리 나의 내 하루의 

나를 일으켜 네 손을 마주 잡고 달려 알 수 없는 세계 

어딘가에 닿아 아득한 눈이 부신 그곳


두 노래 다 차분한 멜로디로 자신에 대해 노래한다. '이유'의 자아는 끊임없이 질문하며 흔들리는 것 같고, '선언'의 자아는 단호한 모습이다. 얼핏 보면 서로 정반대의 태도지만 나는 이 두 노래 자아의 심연엔 비슷한 종류의 슬픔이 있는 것만 같다. 세상과 불화하는 이들의 마음 깊이 자리 잡은 슬픔이다. 나는 이 세상의 주류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자각, 포함되고 싶지 않다는 각성, 그래서 찾아오는 길고 지루한 외로움과의 싸움을 예감한 슬픔 같은 것. 납득할 수 없는 것들에 끊임없이 "이유"를 묻고, 혹은 자신의 삶에 대해 "선언"하는 이들이 느끼는 감정과 닿아있는 그러한 슬픔 말이다. 


나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딱히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슬픔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감정이며, 삶의 원동력이다. 슬픔이 힘이 되려면, 슬픔에 잠식당하지 않으면서 슬픔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슬프다고 악을 쓰며 함께 슬퍼하기를 강요하는 노래보다, 조용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읊조리며 그 뒤에 자리 잡은 슬픔의 감정을 어렴풋하게 느끼게 해주는 노래들이 좋다. 박창근의 '이유'나 윤영배의 '선언' 같은 노래들이 전하는 감정이 좋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