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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Apr 19. 2020

슬기로운 의사생활

신파지만 괜찮아

<평화는 처음이라>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글이 잘 안 써져서 몸풀기를 좀 해야겠다.


요즘 가장 재밌게 보는 드라마는 <슬기로운 의사생활>. 응답하라 시리즈는 1988밖에 안 봤다. 사실 신원호식 드라마에 별 관심이 없었다. 착한 사람들만 득시글거리는 신파는 구닥다리 같았고 남편 찾기도 맘에 매력적이지 않았다. 시그널, 비밀의 숲, 라이프 온 마스, 손 더 게스트처럼 연애 없고 나쁜 놈들 나오는 이야기가 좋았다. 응팔을 본 건 순전히 성보라 때문이었다. 운동권이 등장인물이라서. 그리고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감옥 이야기라서 봤다. 두 편을 섭렵하고 나니 신원호식 착한 사람들의 신파 이야기도 재밌더라.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신원호 드라마여서 보기 시작했다. 물론 배우진도 만족스러웠다. 싫지 않은 야나두, 구동메, 밉지 않은 동식이, 라온마와 슬빵에서 다시 봤던 정경호, 전미도는 누군지 몰랐지만 신원호 드라마 치고는 아는 배우 많은 드라마였다. 주인공이 이렇게 많아서야 어떻게 이야기를 잘 엮어 갈 수 있을지 걱정도 되긴 했지만, 뭐 알아서 잘하겠지. 


드라마 주인공들은 서울대 의대 99학번 동기들이다.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과거 대학시절 이야기도 조금씩 나온다. 과거 장면이 나올 때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대학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나도 99학번이니까.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보여줬던 디테일한 고증 능력이 더욱더 그 시대에 몰입하게 한다. 


물론 완전한 판타지다. 소품과 의상과 노래를 고증했지만, 그 시절의 사회를 고증하진 않는다. 당시는 IMF 직후여서 우리들은 모두 돈이 없었다. 선배들도 돈이 없었다. 그런 건 안 나오고 쿨의 아로하와 부활의 lonely night가 99년을 자동재생시킨다. 


예전 같으면 이렇게 완벽하게 사회가 삭제된 신파에 대해서 아주 날카롭게 반응했을 텐데, 이젠 뭐 이런 드라마도 좋다. 내 대학생활도 운동권으로만 존재한 게 아니니까. IMF가 불러온 신자유주의와 구조조정, 학부제 이런 것만이 내 대학생활을 장식한 것들은 아니니까. 밤새 PC방 가서 스타크래프트 하고, 누가 누굴 좋아한다는 이야기에 함께 설레고 고백하고 차였다는 이야기에 같이 울고 술 마시던 것도 내 대학생활의 일부니까. 


드라마를 보고 나서 선미한테 전화했는데 안 받았다. 아마 학원에 있나 보다. 다른 친구들에게도 연락해볼까 했는데 평소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들이 얼마 없더라. 게다가 시간도 늦어서 그냥 그만뒀다. 


일주일에 한 편 밖에 안 하는 게 조금 아쉽긴 하다. 하얀거탑 같은 병원 내 정치 이야기처럼 극의 긴장감이 엄청 높아서 다음 주까지 못 기다리겠고 안달 나고 그러지도 않는다. 그냥 다음 주 금요일이나 주말쯤에 넷플릭스에 올라온 드라마를 편안한 마음으로 또 보게 될 것만 같다. 다음 주에는 개그 동아리가 무슨 노래 부를까 궁금해하면서. 이러다 내 인생의 의사가 장준혁에서 개그동아리 5인방으로 바뀌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조정석이 이렇게 노래 잘하는 줄 몰랐다 정말. 다음 주는 무슨 노래 들려줄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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