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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un 17. 2020

당신은 스포츠를 볼 때 언제 감동 받습니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 김호령

스포츠 경기를 보면서 사람들은 언제 감동을 받을까? 


타고난 재능을 가진 선수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단련한 힘과 기술을 선보일 때, 예를 들면 김연아나 마이클 조던의 플레이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들을 떠올려본다면 어떨까. 인간의 한계를 확장하는 단련된 근육의 움직임, 근육 조직 틈틈이 스며들어 있을 땀이 빚어내는 동작은 아름다움의 극치다. 


혹은 큰 부상을 당해 누구나 선수생활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선수가 각고의 노력으로 다시 선수로 복귀할 때, 예컨대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입은 이동국이 다시 그라운드에서 골을 넣을 때나 NBA에서 최연소 MVP를 받은 뒤 치명적인 부상으로 코트를 떠난 데릭 로즈가 다시 돌아와 20 득점 이상을 넣을 때, 불사조 박철순의 부활투를 볼 때 스포츠 팬들의 마음에는 뜨거운 것이 차오를 거다. 



포기하지 않을 때, 우리는 감동받는다


그리고 또 한 장면, 패배가 확실한 상황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감동받는다. 최강팀 산왕공업고 농구부에 18점 차로 뒤진 시점에서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강백호가 불러온 감동을 슬램덩크 팬들은 잊지 못한다.(물론 슬램덩크에서는 북산이 그 경기를 이겼다.) 현실에서도 그와 같은 감동을 느낀 적이 있었다. 


2016년 프로야구 포스트시즌. 4위 LG와 5위 기아가 맞붙은 와일드카드전. LG는 1승만 거두면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하고, 기아는 무조건 2승을 거둬야 했다. 1차전은 기아의 승리로 끝났고, 2차전은 팽팽한 투수전이 전개되었다. 9회 초까지 양 팀은 서로에게 1점도 뽑아내지 못했다. LG는 9회말 1사 만루의 찬스에서 김용의는 타구를 잠실 구장 외야 깊숙한 곳으로 날렸다. 희생플라이만 기록해도 경기를 끝낼 수 있는 상황에서 좌중간을 가르는 2루타성 타구를 날린 것이다. 타구를 확인한 모두가 환성을 터뜨리거나 탄식을 터뜨렸다. 방망이가 공을 밀어내는 그 순간, 타구의 궤적을 확인하는 순간 사실 게임은 끝났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1명이 있었다. 김호령은  타구를 끈질기게 쫓아가 기여코 잡아냈다. 하지만 뒤로 달려가며 외야 깊숙한 곳에서 겨우 잡아낸 나머지 3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기엔 충분했다. 이대호나 김태균이 주자였어도 충분할 정도였다. 김호령은 공을 잡고 자세가 무너진 상황에서도 내야로 공을 송구했다. 모두가 포기한 상황, 어쩌면 포기하는 게 합리적인 판단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한 김호령의 플레이는 많은 팬들의 마음에 각인되었다. 


17분 50초부터 보면 김호령의 수비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경기를 끝으로 김호령은 군대에 입대했다. 2016년 기아 타이거즈의 가을야구는 김호령의 슈퍼캐치로 끝났지만, 팬들은 김호령이 제대해서 그와 같은 플레이를 다시 펼쳐주기를 기대했다. 



드래프트 마지막 102번에서 넘버원 수비수로


사실 김호령은 입단 당시 주목받은 선수는 아니었다. 2015년 드래프트에서 김호령은 102번째로 기아 타이거즈에 뽑혔다. 이때 드래프트에서 뽑힌 신인이 103명이었는데, 마지막 103번째 선수가 계약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호령은 자연스럽게 그해 가장 마지막 순번으로 뽑힌 신인 선수가 되었다. 


물론 신인 드래프트에 뽑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해마다 700~100여 명의 고교야구, 대학야구, 사회인야구 선수들이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 도전하지만 고작 100여 명만 프로구단의 지명을 받는다. 프로야구 구단에 지명되는 이들은 다들 아마야구에서 한가닥 했던 선수들이다. 프로야구는 천재들끼리 경쟁하는 곳, 타고난 재능과 운과 노력을 모두 겸비하고도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마다 100여 명 남짓 선택받은 신인들 중에서 1군 무대도 밟아보지 못하는 선수가 절반이고, 나머지 절반 중에서 팬들이 이름을 기억할 정도의 주전급 선수가 되는 이들은 절반밖에 안 된다. 드래프트 최상위 순번으로 뽑히고도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간 선수도 많다. 그러니 드래프트 최하위 순번으로 뽑힌 선수를 기억하는 팬은 드물다. 아주 가끔씩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도 쌍팔년도 이야기다. 


김호령이 단순히 꼴찌 신화를 쓴 선수였다면 흔해 빠진 감동스토리였을 것이다. 물론 아무리 흔해 빠졌더라도, 꼴찌가 각고의 노력 끝에 성장하고 인정받는 이야기는 언제나 값진 이야기다. 하지만 김호령은 흔해 빠진 이야기의 주인공보다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하는 선수였다. 먼저 주목받은 것은 수비였다. 유격수나 포수가 아닌 포지션에서 수비만으로 경기의 흐름을 바꾸는 선수는 많지 않다. 하지만 김호령의 외야 수비는 메이저리그 출신인 버나디나를 코너 외야수로 몰아내고 자신이 드넓은 외야의 중원을 차지할 만큼 임팩트 있었다. 우중간이나 좌중간을 가르는 타구를 전력 질주 한 뒤 슬라이딩을 하며 잡아내는 다이내믹한 수비도 간간히 보여줬지만 김호령 수비의 강점은 그보다는 안정감에 있었다. 뛰어난 타구 판단과 빠른 발로 안타가 될 타구를 어렵게 잡아내고, 어려운 타구는 쉽게 잡아냈다. 


뛰어난 수비, 못지않은 주루에 비해 타격은 많이 부족했다. 프로야구는 타격만 전문으로 하는 지명타자는 있지만, 수비만 전문으로 하는 배구의 리베로 같은 포지션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수비가 중요한 포지션에 공격력이 강한 타자가 있는 팀이 보통 강팀이 된다. 80년대 삼성에 포수 이만수가 있었고, 90년대 해태에 유격수 이종범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중견수 또한 수비가 중요한 포지션이지만 수비만 중요한 포지션은 아니다. 주로 8,9번 타순에 위치하는 포수, 유격수와는 달리 중견수는 공수를 겸비한 경우가 많았다.  이순철부터, 전준호, 이병규, 정수근, 이용규 같은 선수처럼 수비뿐만 아니라 주루나 타격까지 잘하는 선수도 많았다. 그러니 군대 가기 전까지 타격 생산력이 평균을 밑도는 김호령은 감독 입장에서 보자면 수비만 보고 주전으로 쓸 수는 없는 선수였다. (흔히 야구팬들이 참고하는 타격생산력 지표 wRC+에서 김호령은 69.3을 기록하고 있다. 보통 100 정도가 주전 야수들의 평균적인 수치이며, 김호령의 생산력은 중견수보다도 수비 비중이 더 중요한 유격수 중에서도 수비형 유격수들의 생산력과 비슷한 수준이다.)



타격도 되는 김호령, 여전히 감동을 주는 플레이를 기대한다


하지만 이런 처참한 타격 실력에도 불구하고 타이거즈 팬들이 김호령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빼어난 수비 실력 때문만은 아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만이 선사할 수 있는 감동을 김호령이 주기 때문이다. 확실히 김호령의 수비는 단순히 기술적으로 훌륭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최선을 다하고 포기하지 않는다. 때로는 리스크를 줄이며 안전하고 보수적으로 플레이해야 할 때도 김호령은 늘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결과로써 자신의 수비가 실은 가장 안정적인 수비였음을 증명해낸다. 


작년 군대를 제대하고 복귀하는 김호령은 많은 타이거즈 팬들이 반겼다. 그도 그럴 것이 버나디니가 떠난 중견수가 작년 내내 문제였던 것이다. 이창진이 반짝 스타로 떠올랐지만 준수한 타격 실력에 비해 수비는 아직 아쉬웠다. 그나마 이창진도 부상으로 시즌 전에 이탈했고, 이제는 유망주 소리 듣기도 민망한 최원준은 수비에서는 성장을 보여줬지만 타격에서는 오히려 퇴보를 보여주었다. 그러던 중 군 제대 후 부상으로 회복 중이던 김호령이 돌아온 것이다. 타격에서는 큰 기대가 되지 않더라도 수비 하나는 기깔나게 하니, 탄탄한 선발진과 언터쳐블 불펜 필승조에게 큰 힘이 될 거라고, 팬들 모두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김호령은 복귀하는 타석에서 홈런을 때려내더니 지금까지 어마어마한 타격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다. 여전히 삼진이 많은 타자지만 예전에는 삼진만 많고 볼넷은 없던 타자였는데 이제는 볼넷도 제법 골라내는 선구안을 지닌 타자가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타구질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덕분에 올 시즌 때려낸 안타의 절반이 장타(2루타, 3루타, 홈런)다. 이런 김호령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통산 wRC+가 69.3인 선수가 10경기가 넘도록 wRC+가 160이 넘는 것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수치는 팀의 간판인 최형우나 나지완보다 높고 투고타저가 극심했고 기아가 타선의 힘으로 우승했던 2017년과 비교하더라도 최형우 정도만이 현재 김호령의 생산력을 기록했을 정도다. 물론 아직은 표본이 작기 때문에 긴 시즌을 치르는 동안 성적은 하락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선구안이 개선된 만큼 처참하게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니, 김호령의 2020 시즌이 무척 기대된다. 


물론 나는 한국시리즈 우승 11회에 빛나는 타이거즈 팬이니 좀 여유 있게 보려고 한다. 당장 기아 타이거즈가 올 시즌 우승 전력도 아니니 성적에만 연연하지는 않으련다.(라고 쓰고 야구 지는 날은 하이라이트도 안 보는 게 야구팬의 성정이다.) 나는 김호령이 지금처럼 타격도 훌륭한 선수가 되기를 바라지만, 그보다 더 바라는 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선수로 남는 것이다. 야구 잘하는 선수는 많지만 야구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선수는 드물다. 가장 좋은 것은 야구 잘하면서 감동을 주는 선수가 되는 것이겠지만, 내게 우선순위는 감동을 주는 선수가 되는 것이다. 김호령의 2020 시즌이 찬란한 감동으로 빛나면 좋겠다.  



(메인 이미지는 기아타이거즈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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